세종대왕은 조선의 문화와 과학, 그리고 백성의 삶을 근본부터 새롭게 다듬은 위대한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세종은 음악에 조회가 깊어 우리나라만의 독자적 기보법인 정간보 창안, 아악 정비, 향악 창제 등 다양한 음악 업적을 이룩하였다.
이 중 아악은 중국의 고대 국가부터 있었던 제사음악으로 고려시대에 중국 송나라에 유입되었다. 1116년 고려에 유입된 이후, 무신정변, 원나라의 침입 등 사회적 혼란으로 인하여 악기가 소실되고 음악이 어그러졌다. 세종은 유교국가로서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서 어그러진 아악을 정비하였으며,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율관을 제작하였다.
율관 제작은 음악의 기준음을 잡는 작업으로, 그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잡은 기준음을 사용하였으나, 세종은 조선의 독자적 기술로 기준음을 잡고자 하였다. 세종의 율관 제작은 단순히 음악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표준 도량형을 세준 과학적 업적이었다. 율관의 제작으로 인해 백성들의 경제생활과 국가 통치의 질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종은 올바른 음높이를 정하기 위해 기본음인 황종의 길이를 정하는 작업부터 출발했다. 그는 황종의 길이를 정하기 위해 기장알 90알을 늘어놓은 길이를 황종척으로 잡고, 이 길이의 율관을 불었을 때 나오는 음높이를 기준음(황종)으로 정했다.
그리고 지름 12mm의 황종 율관을 기준으로, 그 속에 기장알 1,200알이 들어가는 용량을 황종율관 하나의 부피로 정하고, 황종율관 두 개 분의 부피, 즉 기장알 2,400알이 들어가는 양을 1홉으로 정하고, 10홉을 1되, 10되를 1말로 정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부피 단위의 기준을 세웠다.
이처럼 세종의 율관 제작은 음악의 음률을 바로잡기 위한 시도였지만, 그 결과는 조선의 도량형을 표준화하는 국가적 제도 개혁으로 이어졌다. “같은 양은 같은 값”이라는 공정한 원칙이 세워지고, 백성들은 신뢰할 수 있는 경제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이 만든 황종척을 기준으로, 이후 영조척, 표백척 등 다양한 길이 단위의 자가 제작되었고, 이는 건축, 토목 등 실생활의 측정 기준을 확립했다. 이는 백성들의 노동 효율을 높이고, 집과 농기구, 의복 등을 균형 있게 제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즉, 율관의 제작은 단순히 ‘음악의 조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을 질서 있게 만드는 실용적 과학의 성취였다.
세종은 “음악이 바르면 나라가 바르고, 소리가 고르면 마음이 고르다”라는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였다. 그의 율관 제작은 단순히 음악의 기준음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질서와 공정함을 상징하는 도량형의 기초였다. 세종의 율관 제작은 음악, 과학, 경제를 하나로 통합한 혁신이자, 백성의 삶을 공평하게 만들려는 깊은 애민정신의 결실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도량형 제도의 근본에도 세종의 이러한 원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