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클라베》에서 로렌스 추기경은 새 교황 선정을 위한 절차인 ‘콘클라베’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수년간 교황청에서 봉사하면서, 제가 그 어떤 것보다 두려워하게 된 죄는 확신입니다. 확신은 화합의 가장 큰 적이요, 관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리스도조차 마지막 순간에 확신하지 못하셨습니다. 만약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는 없을 것이고, 더 이상 믿음도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확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로렌스 추기경의 말은 종교를 넘어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올해 ▲헌법 ▲정치와 사회(정치학개론) 수업을 들으면서 민주주의를 각각의 학문적 관점에서 공부했다. 흥미로운 점은 두 학문이 민주주의를 서로 다른 언어로 설명하지만,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학에서는 민주주의 존립의 전제로 ‘가변성’을 꼽는다. 정치에 절대적 진리는 없기에, 선거 결과에 따라 언제든 권력이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특정 정치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이념만을 확신하여 가변성을 차단하거나 차단하기 위해 시민들을 현혹한다면, 그 체제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에 불과하다. 정치학에서는 민주주의의 생명력을 ‘다원주의’에서 찾는다. 정치학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 된 자유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곧 다수결 원칙인데, 다수의 의사에만 매몰되어 다양한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다 보면 결국 약자의 자유와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되어 민주주의는 무의미해진다. 결국 ▲법학의 가변성 ▲정치학의 다원주의는 모두 절대적 확신에 대한 경계를 그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는 이러한 확신이 정치를 집어삼켰을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되는지를 증언한다. 20세기 초, 나치즘은 자신들의 이념을 수정 불가능한 절대선으로 규정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가변성을 거부했고,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제거해야 할 악으로 규정했다.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건강한 의심이 사라진 자리에 광기 어린 확신이 들어섰을 때, 토론과 타협이라는 민주적 절차는 멈췄고 수용소 가스실의 문이 열렸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또한 확신이라는 병증을 심각하게 앓고 있다.
최근의 한국 정치를 보자. 정치인들은 상대 진영을 국정 운영의 파트너가 아닌 청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만연하다. 또한 그들의 지지자들은 우리 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무조건 틀렸다는 도덕적 확신에 갇혀 있다. 나 혹은 우리 진영의 생각이 무조건 옳으며 선이라는 생각이 29번의 탄핵 소추라는 초유의 국정 방해와 위헌·위법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 사태로 이어졌다. 그야말로 정치의 실종이다. 더 심각한 점은 이것이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확증 편향을 강화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든다. 이 때문에 가변성과 다원주의가 설 자리는 잃었고, 잘못된 확신만이 남았다.
201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정치학계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다.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자가 될 사람으로서 확신이 낳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멈추기 위한 교육의 역할을 고민하게 된다. 지금의 학교 교육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시민을 길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확신에 빠진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 교육 현장은 여전히 정답 찾기 경쟁에 매몰되어 있고, 다양한 의견을 이해하는 훈련을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하나의 정답만을 고르도록 강요받는 학생들은, 사회 문제에도 단 하나의 명쾌한 해답이 존재한다고 믿기 쉽다. 이는 나와 다른 답을 가진 타인을 틀린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토양이 된다.
진정한 시민 교육은 정답을 찾는 법이 아니라 의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침묵시키는 의견이 진리일지도 모르기에 ‘인식론적 오류 가능성’을 토론의 대전제로 삼아야 한다”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교실은 학생들이 자신의 주장이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인식론적 겸손’을 배우는 공간이어야 한다. 특히 사회과 수업에서 논쟁적인 주제를 다룰 때,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반대 측의 논리에도 타당성이 있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나의 생각은 잠정적이며,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언제든 수정될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 즉 확신이 아닌 가변성을 체화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교육이 최우선으로 이루어내야 하는 과제이다.
영화 속 로렌스 추기경의 말처럼 믿음은 의심과 손을 잡고 걸을 때 비로소 살아 숨 쉰다. 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진 정치적 신념이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인정할 때, 비로소 대화가 시작되고 공존이 가능해진다.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하는 힘은 상대방이 민주주의 위기의 원흉이라는 강력한 확신이 아니라 기꺼이 흔들릴 줄 아는 부드러운 의심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교육자들도 확신의 늪에 빠진 우리 사회를 공존과 화합의 장으로 되돌릴 교육적 방안을 끊임없이 강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