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과 대립, 혐오와 갈등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만연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사유의 전환이 필요할까? 이런 현상이 정치권 같은 특정 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개개인이 누려야 할 평범한 일상마저 힘겹게 한다. 동서고금의 사상가들은 이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해법을 내놓았는데, 필자는 조선의 기(氣) 철학자로 알려진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이 제안한 ‘그침[止]’의 사유를 문득 떠올려 본다.
잠깐 화담에 대해 소개하면, 1489년 지금의 개성 지역에서 한미한 집안의 자녀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에는 자연을 관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고, 자라서는 특정한 스승 없이 경서를 독학하였다. 4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기도 하였으나, 과거(科擧)에는 더 이상 응시하지 않았고 한평생을 처사(處士)로 지냈다. 만년에 화담정사를 지어 여러 문하생을 가르치기도 했던 그는, 58세에 생사의 이치를 안 지 오래되어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을 남긴 뒤 사망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도 화담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 샀는데, 송도삼절(松都三絶: 화담, 황진이, 박연 폭포) 같은 이야기 속 등장인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만물은 태허(太虛)로부터 왔다가 다시 흩어져 태허로 돌아간다고 보았기에 죽음과 삶의 문제에서조차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화담은, 친구인 대관재(大觀齋) 심의(沈義)를 전송하는 글에서 천하의 사물과 여러 일에는 각각 그것에 알맞은 그침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 하늘은 위에 있는 것이 마땅하고, 땅은 아래에 자리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또 산은 우뚝 솟고 물은 졸졸 흐르며 새는 날고 짐승은 기어다니는 것이 당연한데, 이것은 각각 그쳐야 할 곳에서 그친 것이어서 혼란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상상해 보건대, 만일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으면 우리는 매우 당황스럽고 어지럽지 않을까?
이와 유사하게 화담은 인간과 사회에도 그침이 없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의 사이에도 그쳐야 할 바[恩]가 있고,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서도 그쳐야 할 곳[義]이 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서도 그쳐야 할 데가 있다고 하였다. 별로 길지도 않고 어찌 보면 상식적이기까지 한 화담의 제안은, 그럼에도 우리에게 제법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잘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경쟁, 대립, 혐오, 갈등의 원인은, 그쳐야 할 곳에서 그치지 않고 과도하게 추구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즉, 원하는 대상을 강제로 취하거나 무엇인가를 억지로 조장하려고 하는 데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화담의 그치라는 표현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래서 화담은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는 것은 그 행동에서 그치는 것이고, 머물러야 할 때 머무르는 것은 그 머무름에서 그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화담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는 결단하여 단호히 행동하되, 그쳐야 하는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곳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화담이 우리 인간이 좇고 따라야 할 삶의 준칙을 하늘과 땅, 산, 물 같은 자연에서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나날이 빠르게 망가지고 있는 지구와 환경의 모습이 최근 들어 더욱 빈번히 발생하는 생명 경시, 테러, 전쟁 같은 인재(人災)와도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