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늦은 것이다. 오래 전 한 개그맨이 TV에서 말하며 유명해진 말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오래된 격언을 비틀어서 툭 던진 그 말. 허를 찌르는 반전에 피식 웃으며 ‘그렇긴 하지’라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2024년 1학기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다. 축제가 끝나고 기말고사의 압박이 느껴지며,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학기가 끝나간다고?’라는 생각에 망연자실해질 무렵이다. 이 또한 유구한 전통이다. 10년 전, 20년 전에도 이 무렵이 되면 전국의 대학생들이 비슷한 고뇌에 빠져 머리를 잡아 뜯곤 했다. “어린아이가 늙는 것은 쉬운데, 학문은 이루기가 어렵구나.”라는 싯구를 주희가 남긴 것이 800여 년 전이니, ‘나는 왜 이럴까?’라는 자괴감에 너무 빠져들지는 말자. 나만 그런 게 아니니.
지난주 토요일 아침의 일이다. 청주에서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7시에 차로 출발하면 1시간 40분 정도 걸리는 여정이다. 그때가 가장 빠른 편이다. 잘만 하면 식구들과 아침 식사를 같이할 수도 있다. 마땅히 서두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내일 일찍 가겠노라고 금요일 저녁에 철석같이 호언장담도 해 둔 터였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니 이미 거의 7시가 된 시각. 짐을 챙겨 나갈 준비를 하고 출발하려면 한 시간은 걸린다. 8시에 출발하면 이미 차가 슬슬 막히기 시작해서, 두 시간 넘게 걸린다. 딸아이에게 혼날 생각에 머리가 아득해진다. 허둥지둥 움직이며 준비를 시작한다. 의자에 발을 부딪치고, 물건 옮기다가 떨어뜨리고, 물잔을 엎지르고…. 이런 걸 예전에는 ‘난리 부르스’라는 말로 묘사했다.
급히 짐을 챙겨 차 문을 여니 7시 45분. 계기판을 보니 하필 기름도 넣어야 할 때다. 헐레벌떡 주유소에 차를 대고 주유기를 꽂았다. 이쯤 되면 이미 머릿속은 엉망이다. 서두를 땐 언제나 그렇다. 땡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주유기를 뽑았다. 그 순간, 주유기 끝에서 맑은 기름이 왈칵 뿜어졌다. 처음 보는 광경에 잠시 머리가 굳었다. ‘아, 끝나고도 잠깐 기름이 더 나오지….’ 원래 살짝 기다렸다가 뽑아야 하는데.
그 순간,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정신이 없는 채로 운전하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잠시 멈춰 호흡을 가다듬으며 급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3초? 5초? 그랬더니 차분해졌다. 몇 초밖에 안 걸리는 일이었다. 주유기를 다시 걸어두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날 나는 무사히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늦었다고 면박을 좀 당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늦었다고 생각이 든다면 정말 늦은 것이다.” 그 말에는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니 당장 시작해라.” 훌륭한 마무리다. 이미 늦은 것은 기정사실이니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말. 언제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허둥지둥하지 말라.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할 때, 잠시 시간을 내서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남은 주어진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그 일을 차근차근 진행해야 한다. 무턱대고 서두른다고 일이 더 잘 되는 것도 아니다. 우선 차분함을 되찾고,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의 노력을 하면 된다.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늦었으니까. 하지만 작은 결과라도 무사히 맺는 것. 긴 삶의 여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작은 성취들이다.
흘러가는 빠른 시간에 한탄하며 늦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동지들이여. 황망함과 불안감에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자. 잠시 심호흡을 하면 좋다. 너무 길게 하면 잠들어 버리니, 짧게만.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만 잠시 여유를 찾고, 남은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써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