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교육체제는 국가가 주도하는 표준화된 특성을 보이고 있다. 표준화는 장점이 있지만, 획일화의 위험성도 있다. 미래교육의 본질 중 하나는 학생 개개인의 고유성이나 특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살리는 교육체제의 구현이다. 고교학점제는 그 가치를 구현하는 유의미한 정책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보면, 고교학점제를 나름 실현하는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학년제가 아닌 학기제를 적용하고 있다. 교사로서는 사실 학년제 운영이 편한데, 학기제를 적용한다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학생을 위해 교과목을 더 열어 준다는 의지의 반영으로 봐야 한다. 동시에, 학생들과 상담을 하면서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과목을 열려고 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동시에 학교 지정과목을 최소화하고, 선택과목을 많이 열어 주기 위해 노력을 한다. 일방적으로 교육과정을 설계하지 않고, 거버넌스 내지는 민주주의의 정신에 기초하여 교육과정 기획과 설계의 과정에 학생과 학부모, 교원의 참여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상위권 학생이 아닌 중하위권 학생들도 들을 수 있는 과목을 많이 열어 주고 있다. 심지어는 고 2부터는 국영수를 듣지 않을 권리도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나타난 배경은 무엇일까? 기존 교육과정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이다. 운전자의 시선으로 보면 육교가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 보행자의 시선으로 봐야 육교의 불편함을 인식할 수 있다. 이처럼 좋은 교육과정을 위해서는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과정 요구를 먼저 파악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동시에, 학교가 어떤 존재를 기를 것인가에 관한 비전과 철학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입시 현실에 굴복하여 수능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설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학생들은 다양하다. 모든 학생들이 수능을 잘 보는 것도 아니고, 수능만으로 대학을 가는 것도 아니다.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교육과정에 새로운 상상력을 입혀야 한다.

또 하나, 성찰할 지점이 있다. 학교알리미 사이트에 들어가서 대부분의 일반계 고등학교의 내신 성적 분포를 살펴보라. 국영수사과를 중심으로 보면, 학업성취도 E를 맞는 학생들의 비율이 30-50% 정도 달한다.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1등급을 맞고, 누군가는 9등급을 맞아야 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모습이겠지만, 절대평가의 시선으로 보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고등학교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학습결손이 누적된 결과이다. 출석일수만으로 진급과 졸업이 결정되는 허술한 시스템이 낳은 결과로 봐야 한다. 고교학점제의 본질은 사실 교육과정의 다양화라기보다는 책임교육의 구현이다. 예컨대, 수학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기초수학이나 기본수학, 생활수학 등 위계와 수준을 낮추어 들을 수 있는 과목의 대체 경로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것을 강제로 하면 수준별 수업이 되지만, 학생 스스로의 선택을 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러한 학습경로의 다변화를 만든다면 고교학점제를 통해 수업 소외 현상을 줄일 수 있다. 교육과정을 못 따라오는 학생들에게 졸업을 못한다고 겁을 주는 방식이 아닌, 그 학생이 최소성취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과거에는 학급당 학생 수가 많았을 때, 이를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학급당 학생 수가 현저히 줄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도전해 볼 만한 과제이다. 경쟁이 격화될 때, 상대평가제가 필요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 학생들의 수는 계속 줄고 있다. 협업과 협력, 연대의 가치가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기업에서도 협력하는 인간을 요구하지, ‘혼자서만 일하는 외로운 천재를 원하지는 않고 있다. 성취평가제를 통해 특정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학생을 도와줄 수 있는 학습경로의 다변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불필요한 경쟁을 줄일 수 있고, 평가가 바뀌면 교육과정과 수업에서 다양한 실험도 가능하다. 대학에서도 상대평가를 적용하게 되면 학생들이 받는 심리적 압박이 큰데, 고등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에 관한 다양한 실험은 성취평가제 및 절대평가에서 시작되며, 상대평가 체제는 이제 기억과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낼 때가 서서히 오고 있다.

가야 할 길은 멀다. 고교체제 개편- 고교학점제- 내신 성취평가제- 수능체제 개편은 사실 세트 정책인데, 특목고와 자사고를 존치하게 되면 이러한 정책은 흐트러진다. 정부의 발표를 보면 고 1도 성취평가제를 적용해야 하는데, 상대평가제를 적용할 예정이다. 그 이유는 성취평가제 도입이 자칫 특목고와 자사고의 전성시대를 열고, 일반고 슬럼화를 막기 위해서이다. 부모의 계층 배경에 따라서 학생의 고교 수준이 달라지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새로운 고교체제 개편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동시에 고교학점제는 정시확대와 충돌한다. 정시확대를 하면서 고교학점제를 추진하는 상황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상황과 다르지 않다. 교육과정 개편과 함께 고교학점제의 철학과 가치를 반영한 대입 제도가 요구된다.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의 선택권을 강조하는 만큼 교사들의 부담은 커진다. 다과목을 가르칠 수도 있고, 교육과정의 안정성이 떨어진다. 이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적지 않다. 철학과 취지에 공감하는 것과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고교학점제가 어려운 학교는 농어촌 지역이다. 강사를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원 수급은 고교학점제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교육지원청의 학교 지원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교육지원청에서 교·강사를 구하고, 공동교육과정 등 일부 과목을 열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학교 밖에 특정 콘텐츠를 지닌 기관 및 단체와 협약을 맺고 일부 교양강좌 등을 개설할 수도 있다, 특히, 대학은 고교학점제 활성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강좌를 들으러 이동할 때, 교통 편의 제공 등 행정 서비스가 필요하다. 온라인 강좌를 중심으로 하면서 실기와 실습, 프로젝트 활동을 부분적으로 대면으로 실행하는 방법도 적용할 만하다. 각 고등학교에 5천만 원-1억 원 정도만 추가 투입해도, 교육과정의 질은 달라질 수 있다. 투자 없이 좋은 교육과정을 설계하기는 어렵다.

노동시장에서는 어떤 인재를 원하는가? 결국 지원자의 역량을 보는 것이 핵심이며,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문제해결력, 협업능력, 소통능력, 창의력, 자기주도학습력 등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이를 보편 역량으로 본다면, 그것을 고등학교에서 길러야 한다. 수능 시험을 보고 나면, 수험생들은 1년 내내 붙들었던 문제집과 교과서를 다 버린다. 고득점을 위한 시험 체제의 한계를 보여 준다. 우리의 삶으로 전이될 수 있는 교육의 힘이라든지 힘든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을 교육이 주고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반문하면서 교육주체들은 성찰하고 자문하면서 길을 함께 찾아야 한다. 미래교육은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일상과 관행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고교학점제는 무엇이 좋은 교육과정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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