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유지(Yuji)’ 논란으로 희화되는 표절사건이 벌써 수개월째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의 위상을 뒤흔들고 있다. 우리 사회의 암울하고 씁쓸한 단면들이 그 속에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듯하다. 무도한 권력과 추악한 기생 자본의 절묘한 결합을 보여 주는 뒤틀린 만화경 속 혼탁한 세계처럼 말이다. 우리를 더욱 씁쓸하게 만드는 것은 소위 학문의 전당으로 불리는 대학이 그 모순된 세계의 첨병 노릇을 해 왔고 또 버젓이 자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과 자본의 올가미에 걸려 버린 오늘날 대학의 뒤틀린 초상화다. 교육과 학문의 주체라는 미명 아래 그리고 지식 공동체의 주인이라는 허울 좋은 방패 뒤에 숨어, 사적 이익과 혜택만을 쫓아온 결과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견 관계없어 보이는 역사에서 이정표를 찾아보자.
중세 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전쟁 초기의 어느 해, 프랑스 북부의 도시 칼레에서 감동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기록에 따르면, 신속하게 프랑스를 정복하려던 영국 왕은 예상치 못한 칼레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1년 남짓한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이에 도시 함락을 목전에 두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칼레인들을 몰살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저런 연유로 생각을 바꾼 그는 칼레의 대표 인사 6인의 목숨을 바친다면 다른 이들을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때문에 칼레의 시민들은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라는 당혹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한 인사가 자원하게 되었고, 곧이어 5인의 상류층 인사들이 이 죽음의 길에 뒤따르면서 다른 칼레인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 일화는 후대인들에게 신화처럼 지속되었고, 결국 프랑스의 유명한 조각가 로댕에 의해 <칼레의 시민>이라는 작품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런데 그의 손끝에서 창조된 6인의 모습은 고통에 빠져 죽음의 길에 다가서는 가련하고 유약한 인간들이었다. 작품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여러 프랑스인들이 적지 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로댕이 담담히 죽음에 맞서기보다 그것을 두려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보통 사람들로 자신들의 영웅을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댕은 영웅적인 모습으로 재현하면 진실한 이야기를 담을 수 없다고 말하며 고뇌에 찬 ‘보통’ 인간의 모습이 영웅의 ‘참된’ 이미지라고 항변했다.
오늘날 우리는 소위 지도층 인사들 가운데 영웅은커녕 결코 인간적이지도 못한 많은 이들을 목격한다. 부끄러움 자체를 모르는 그들에게서는 소박한 염치도, 그 어떤 체면도 기대하기 어려운 듯하다. 이것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갈망케 하는 이 혼탁한 세상에서, 로댕이 재현한 보통의 영웅들을 그리게 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유지’ 논란에 애써 눈길을 피하고 있는 대학 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학문적 순수성과 진실성은 대학 사회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고, 대학을 대학답게 만드는 최소한의 염치와 체면이다. 위드-코로나와 함께 대학의 생동감이 되살아나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금 우리는 이 염치와 체면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런 반성적 질문은 종합교원양성기관으로 특화된 우리 대학의 구성원들에게 더욱 절실하게 제기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보다 이는 미래 교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지적 진실성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한낱 ‘자격증 수여 기관’으로 자임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이에 비추어 생각하면, 대학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만약 학문적 진실성과 독창성에 기초한 지적 수월성의 추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우리 대학원이 ‘학문 후속 세대 양성’이라는 대학원 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채 그저 ‘학위 장사 기관’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유지’ 논란을 지켜보며 염치와 체면을 떠올린 이유다. 우리 대학원이 교육기관의 본령을 무시한 채 학위 세탁자를 양산하는 부끄러운 온상으로 전락하는 듯해서다. 각자도생과 무한 경쟁이라는 그릇된 외부 환경을 구실 삼아, 우리마저 고등교육기관이 지켜야 할 엄정한 학문적 기준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를 위해서는 ‘연구윤리교육’의 강화와 같은 형식적인 개선책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대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먼저 질적 수월성을 포기한 채 그저 학위 수여에만 급급한 것처럼 보이는 대학원 운영 전반에 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그에 기초해 경제적 실리와 행정적 편의 그리고 수요자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지속되고 있는 파행적인 학사 운영을 지양해야 한다. 이와 관련된 대학 당국의 인식 전환과 제도적 보완 장치의 마련 그리고 지원을 촉구한다.
우리 스스로 ‘자격증 수여 기관’ 혹은 ‘학위 장사 기관’이라는 오명의 길로 들어설 수는 없지 않는가.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칼레의 시민들이 보여 준 영웅적인 죽음과 같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다. 그저 고등교육기관에 몸담고 있는 지식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체면으로도 충분하다. 일상을 되찾은 듯 이번 학기에는 코로나로 미뤄 둔 대학의 여러 행사들이 재개되고 있고, 그것을 반영하듯 구성원들의 일정표가 학교의 이러저런 행사로 채워지고 있다. 모처럼 대학의 생명력이 되살아나듯 교정 곳곳이 들썩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외형적인 일상으로의 복귀만이 우리 대학을 대학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학문과 지식의 공간이라는 대학 본령으로의 복귀가 함께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지성인의 양심과 지적 성실성만이 ‘우리 안의 유지’를 막는 방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