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 교사연수를 마치고 연수에 참여한 중・고등학교 미술교사 분들의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중 이런 얘기가 있었다. “미술은 왜 배워야 하나요?”, “대학을 가는 데 필요한 과목도 아닌데…….” 학생들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숨이 쉬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고민하기도 한다는 선생님의 푸념이었다. 미술은 왜 필요할까? 미술교육은 왜 해야 할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필요 없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장자(莊子)』의 「인간세(人間世)」에는 장석(匠石)이라는 솜씨 좋은 목수 얘기가 나온다. 그는 어느 마을 사당 앞을 지나다가 큰 상수리나무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큰 배를 만들고도 남을 만한 이 나무에 그는 관심이 없었다. 함께 한 제자가 이유를 물으니 그 나무는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그릇을 만들면 쉽게 부서지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먹어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무의 신령이 불쑥 꿈에 나와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과실수나 목재로 쓰이는 나무는 가지가 꺾이거나 베어져 죽지만 오히려 자신은 살아서 오랫동안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복을 기원하기도 하고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더위를 피하게 해 주는 그 나무의 진짜 쓸모는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한국화, 동양화라고 부르는 미술이 있다. 학생들에게 한국화나 동양화를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고 하면 종종 여백의 미라고 말한다. 그림은 종이에 붓으로 그린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붓이 지난 흔적일 뿐인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공간이 아름답다는 것일까.
세계적인 현대미술작가 이우환(李禹煥, 1936~)은 점과 선으로 만든 추상적인 작품세계로 유명하다. 그는 여백이 아름다운 이유가 그것이 단지 비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이 서로 반향하면서 서로에게 응답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약 텅 빈 종이에 배를 한 척 그리거나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그린다면 나머지 빈 공간은 어떻게 보일까. 아마 강이나 바다, 하늘쯤이 되지 않을까.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마음속으로 그 곳을 상상할 수 있다. 때문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대나무를 그린 화가의 마음이 대나무가 아닌 바람에 있다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우리 미술의 특징이자 우리가 아름다움을 보는 방법이다.
입시를 앞둔 학생에게 보이는 교육의 쓸모는 아마 바라는 점수나 진학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삶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육부가 발표한 2022년 개정 교육과정의 방향도 지속 가능한 미래와 불확실성에 대한 준비를 강조하고 있다. 몇 년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바꿔 놓은 사회의 모습을 이미 확인하였다. 인공지능과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환경의 변화도 역시 마찬가지다. 미리 알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그 해법은 기존 사회의 통념이나 이해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요컨대 미술교육의 큰 쓸모는 학생의 말처럼 그 쓸모없음에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쓸모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당의 상수리나무가 천수를 누리고 여백이 화가의 마음을 담아내듯이 보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관심과 타자를 보는 시선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 더 확장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