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재미난 사연을 보게 되었다. 낮에는 환경미화를 하시는 나이 지긋하신 남자분이 여가시간을 활용해서 연필심으로 조각을 너무도 기가 막히도록 멋지게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작은 연필심이 기린으로, 자동차로, 에펠탑으로 멋들어지게 변신하는 것에 감탄하며 집중하게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궁금함이 생겼다. 시쳇말로 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에 저토록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말이다. 그것 역시 호기심이었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굳이 돋보기 없이는 볼 수도 없는 재료로 조각을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던 중, 그 연필심 조각가의 인터뷰에서 인생 최애, 최고의 한마디를 듣게 되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상황은 이랬다. 연필심 조각가가 하루 종일 고단한 일과를 지낸 다음, 꿀 같은 여가 시간을 틈타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연필심을 만져야 했기에 손은 시커멓게 변했고, 돋보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기에 그 정교함의 정도는 고도의 집중과 심혈을 필요로 했다. 조각가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는 채 점점 더 허리를 구부렸고, 그러면 그럴수록 눈은 더 빨개졌다. 시간은 벌써 세 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완성을 눈앞에 두고서 정말 어이없는 실수로 연필심이 부러진 것이다. 몇 시간의 공정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조각가에게 화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다. 조각가의 답변은 이렇다. “화가 나면 그 다음 작업에 지장이 갑니다. 화가 나면 이 작업을 할 수가 없지요. 물론 아쉽습니다. 하지만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라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은 !”이다. 수많은 철학서적을 통해서도 얻지 못한 지혜를 연필심 조각가에게 얻을 줄이야. 아름다운 연필심 조각을 완성해 가는 과정 속에서 충분히 평온함과 충만감을 보상받았다는 지론이다. 그분에게는 수많은 완성된 아름다운 작품들이 있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이 많다고 해서 지금 작업하고 있었던 작품이 덜 소중한 것도 아니며, 완성도가 덜한 것도 아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연필심 조각은 작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작업 그 자체가 의미 있었던 것이다. 조각품을 만들어 가면서 완성을 향한 상상을 하며 행복한 꿈을 꾸었고, 실력을 길렀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충분히 행복했다는 것이다.

어느새 11월이 되었다. 일 년 내내, 아니 수년간 갈고 닦았던 많은 공부와 연구들이 평가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연필심으로 조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역시 그 비슷한 작업들을 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잣대가 다를지는 모르지만, 각자 미래를 위해서 나름의 현재를 희생하며 노력해 왔다. 하지만 시험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놓쳐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가 말이다. 물론 임용고사나 논문 작성은 연필심 조각과는 다르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투와도 같다. 하지만 그것 또한 삶의 일부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연필심 조각가에게 있어 작업 그 자체가 삶의 의미였듯이, 노력하는 오늘이 우리에게 고결한 의미로 남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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