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에 개봉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실존 인물이었던 유대계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의 파란만장한 2차 세계대전 생존기를 다루고 있다. 가족이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뒤 홀로 목숨을 건진 슈필만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아슬아슬하게 독일군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게토에서 독일군 장교를 마주치게 된다. 그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죽음을 무릅 쓴 슈필만의 불꽃처럼 뜨거운 연주를 감상하던 독일군 장교는 그가 나치를 피해 도망 다니는 유대인임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재능에 감탄한 독일군 장교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는 슈필만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며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이라고 말해 주고 떠난다.

1802년 세계적인 작곡가 베토벤은 그의 귓병이 악화되어 음악가라는 직업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게 되자 삶을 포기하려고 하였다. 죽음을 선택하려는 순간, 베토벤은 사랑하는 음악과 예술적 재능을 모두 발휘하기 전에는, 설령 운명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음악가로서 죽음과 맞서 싸우겠다는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남겼다. 이에 대해 후세의 많은 학자들은 도대체 음악이 무엇이관데, 죽으려던 사람의 마음마저 바꾸고 삶의 의지를 불사르게 하는가?’란 주제를 연구하며 음악미학의 토대를 쌓는다.

죽음 앞에서도 굳건히 맞서 생명을 지켜 내는 초능력적인 힘을 발휘하는 음악은 굳이 역사적으로 유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음악가들에게만 경험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2011311일 일본 도호쿠 지역에 덮친 대지진과 쓰나미로 많은 사상자와 피해가 발생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미야기현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쓰나미가 덮친다는 뉴스에 학생들을 데리고 급히 건물 옥상으로 대피하였으며, 구조대를 기다리는 몇 날 며칠 동안 두려워하는 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음악시간에 학습한 동요를 부르며 귀한 생명을 지켜 냈다고 한다.

2020‘COVID-19 팬데믹이 세계를 덮친 초기, 통째로 자가 격리된 이탈리아의 한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각자의 발코니에 나와, 서로 멀리 떨어진 채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흥을 돋우기 위하여 가재도구를 두드리며 서로를 위로하는 동영상을 접하였다. 마치 코로나를 비웃는 듯한 그들의 연주와 노래는 단지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는 순간의 여흥을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비록 연주가 끝나도 코로나가 금방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자가 격리의 답답함과 현실의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한 지독한 전염병의 시대를 굴복하지 않고 맞서 견디고 이겨 나아가겠다는 의지와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의 역할은 절대로 작지 않았다. 워낙 공교육에서도 전문연주자와 같은 아마추어를 키워 내는 11악기 음악교육이 잘 이루어진 유럽인만큼 평범한 시민들의 발코니 연주는 소박하였지만 그들의 고통을 음악적으로 승화한 외침이었고 이는 세계에 충분히 감동을 주었다.

이렇듯 음악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위기 상황에 더 빛을 발한다. 그것이 죽음 앞에서건, 두려움 앞에서건, 전염병 앞에서건, 음악은 충분히 학습되어진 손 근육에 배어 있는 감각으로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에 마음을 위로하고 삶의 의지를 토닥여 준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의 사회적교육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며, 예술이 학생 교육에 중요하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학교마다 예산이 축소되고 교육과정을 개편해야 할 때가 되어 어느 과목을 넣고 뺄지 고심할 때, 또는 강좌를 개설하기 위한 최소 인원을 설정할 때가 되면 늘 예술 교과는 잘려 나가고 축소되어지고, 예술 실기 교과의 특성과 교수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론 강의와 동일한 수강인원에 맞춰 개설하려는 학교 행정과 맞서게 된다. <가치를 인정하는 것><필요한 것> 사이의 분리 상태는 너무나 자주 학생들을 부당하게 속인다. 예술은 태평성대를 누리는 시대에만 교육하는 과목이 아니다. 지금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이 순간, 우리에게 더 필요한 교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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