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인근 학교들 중 가장 먼저 두발 자율화를 실시했다. 대개 머리를 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몇몇 멋쟁이 친구들은 적당히 파마를 하거나 염색을 했다. 눈에 띌 만큼 화려하거나 지저분하지 않다면 모든 머리 형태는 용인되었다. 물론 선생님들은 공부하는 녀석들이 머리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냐고 핀잔을 놓았지만.

다만 그 즈음의 나는 선생님들의 핀잔 때문이 아니라, 매일 아침 머리를 감고 한참을 말려야 하는 머리카락이라는 귀찮기만 한 것에 싫증이 났다. 결국 어느 날 머리를 자르러 가서는 아예 싹 다 밀어주세요. 몇 미리 이런 거 따질 필요 없이요. 라고 말하며 수년 가까이 가꿔온 머리카락과 작별했다. 썩둑썩둑 잘려나가며 무수히 쌓이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잠시 심란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지만 말끔한 까까머리를 거울에 비춰보곤 곧 신이 났다. 한 번 싹 쓰다듬으면 이게 내가 진정 원하던 청량함이라는 확신이 섰다. 열일곱 살 내 얼굴은 달걀같이 동글동글한 모양새였다.

 

“How many times our potential was anonymous?”

「i」, Kendrick Lamar

 

다음날 등굣길을 지나며 맞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바람이 슬쩍 이마를 스치고 귀 뒤편까지 간질이는 기분을 머리가 긴 사람은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두발 자율화가 실시된 학교에서 나만이 박박 깎은 머리로 휘청휘청 걷는 것은 묘한 긴장감과 충만함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당황스런 사태가 발생했다. 아침 조회를 마친 담임선생이 따로 나를 부른 것이다. 집에 나쁜 일이 있느냐.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뭐 이런 오지랖이었다. 나는 그냥 기분 따라 깔끔하게 머리를 잘랐을 뿐이라고 답했다. 재차 근심이 있는지 집에 사고가 났는지를 확인하던 선생은 끝으로 너무 반항적으로 머리를 자르면 보기 좋지 않다고 충고를 덧붙였다. 두발은 자율적인 거라면서 얼마 전에는.

내 얼굴이 그렇게도 불량하게 생겼나? 반항적인 머리란 또 무엇일까? 뭐가 어찌됐든 선생님의 충고는 내겐 그저 웃음거리였을 뿐이었다. 엄마, 내가 머리를 이렇게 자르고 갔더니 선생님이 집에 무슨 일 있냐고 묻던데. 킥킥. 그렇게 내가 무섭게 생겼어 엄마? 응, 너 생긴 거 보니까 좀 기르는 게 낫겠다.

 

“How many times the city making me promises?”

「i」, Kendrick Lamar

 

‘반항적인’ 머리 스타일을 삼 년 동안 고수하던, 재미있게도 그 반항적인 머리 스타일이란 게 아주 깔끔히 박박 깎은 머리였지만, 불만 많고 뭔가 꼬여있던 고등학생은 이제 교육실습을 가게 된다. 날 가르치려고 애쓰던, 혹은 내 생각을 비웃고 그것을 뜯어 고치려던 선생들을 늘 난처하게 만드는 것에 능숙했던 내가 교육 현장에 다시 돌아가다니.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참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나는 나같이 매사에 냉소적이고 쉬이 모든 것을 따분히 여기는 학생을 만나게 되면 어떤 말을 해줘야 하나. 어른들이 보기에 두려운, 반항적인 눈빛을 가진 어린 친구들은 그들 앞에 놓인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수십 년 전, 수백 년 전의 선입견이 미처 자리하지 못한 신선한 안구에 비치는 세계는 어떤 향기를 품고 있으며 어떤 빛깔을 뿜어내고 있을까. 나와 마주치게 될 학생들을 떠올리니 정신이 아찔하다.

 

“So I promise this and I love myself”

「i」, Kendrick Lamar

 

삶이란 잠깐의 관찰과 과감한 해석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어린 눈동자에 비친 어색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스물두 살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국기에 대한 경례부터 차렷 열중 쉬어, 나를 따로 불러 머리 스타일도 반항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친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증오하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정말 모순적이게도 나는 내가 거북해하는 것들과 점점 닮아간다.

사 주 간의 실습 동안 어린 학생들에게서 배우고 싶다. 어린 학생들에게 함부로 서툰 약속을 하는 어른들과 그 어설픈 약속마저 허무하게 구겨지는 광경을 우린 너무 많이 봐왔다. 오만한 어른들의 입김 아래서 아이들은 성장을 강요받고 자잘한 것들을 눈치 보는 버릇을 키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주목해야할 점은, 이 고리타분한 세계는 언제나 어린 생명의 눈빛과 정신을 닮길 갈망해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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