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산다. 오늘 아침은 이미 기억 저편의 시간으로 분류되었고, 저녁은 아직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미래의 시간일 뿐이다. 그것을 불교철학에서는 이 순간에의 집중이 바람직한 삶의 핵심이라는 말로 강조한다. 실존철학자들의 ‘본질에 앞서는 실존’ 명제 또한 일정 부분 이러한 순간의 미학을 담아내고자 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늘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과거의 어느 기억에 붙들려 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백일몽을 꾸곤 한다.
이 순간들의 삶이 이어져 한 사람의 역사를 이루고, 그 역사는 다시 어느 시점에서 돌아보거나 내다보며 풀어내는 이야기로 환원된다. 우리 삶이 서사(敍事) 또는 내러티브(narrative)라는 명제가 바로 그렇게 이야기로 환원되는 삶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교육이란 다름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거나 도와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나선형 교육과정과 지식의 구조라는 개념으로 알려진 제롬 부르너(J. Burner)가 자신의 학자 생애 후기에 ‘문화에 기반한 내러티브로서의 교육’에 주목한 것도 그런 관심을 새롭게 공유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과거와 미래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면서 현재의 관심사에만 집중하는 근시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 교육철학계에서 가장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미국 철학자 존 듀이(J. Dewey)의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실용주의(實用主義)라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 실용이 즉각적인 쓸모있음으로 받아들인 역사적 오류와도 통하는 것이다. 이 순간의 삶 속에는 당연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것들이 들어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과거의 기억에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더해져 미래로 이어진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지금 이 순간에 들어와 있는 그 과거에 대한 직시(直視)와 미래까지 내다보면서 현재의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숙고와 실천의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관계를 갈망하는 관계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 관계는 다시 가족이나 국가, 지구공동체 같은 공동체의 맥락으로 이어진다. 21세기 초반 인간의 삶은 누구도 쉽게 피해갈 수 없는 인터넷과 자본주의 시장 기반의 세계화 흐름 속에서 촘촘해지는 관계망 속으로 편입되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원자핵발전소 사고와 중국의 대도시 공기 오염이 곧바로 우리 미세먼지 농도나 황사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같은 먼 곳 사람들의 삶이 사회연결망서비스(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세계화의 미래가 인류의 종말 위기를 포함하고 았는 데서 생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한 순간에 없애버릴 수 있는 핵무기와 일반 마스크로는 막을 수 없다는 미세먼지의 공포, 그리고 우리에게도 경주 지방 지진으로 현실화된 원자핵발전소 폭발 위험 등이 그러한 위기의 징후들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위기와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회피하거나 누군가 해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현실이다. 그 현실 속에서 이른바 원전마피아라고 불리는 세력들은 원자핵발전소가 안전하고 깨끗하다는 무너진 신화를 고장 난 스피커처럼 되뇌면서 더 지을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고등학교 수학교사 출신 교육철학자이자 도덕교육론자인 넬 나딩스(N. Noddings)는 20세기와 비교하여 21세기가 지니는 가장 핵심적인 차이를 인류 종말의 위기를 누구나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된 점이라고 강조한다, 20세기에도 유대인 학살을 상징하는 아우슈비츠와 원자폭탄 투하를 상징하는 히로시마가 존재했지만, 21세기는 지구촌 모든 곳에서 그런 위기 징후와 마주하고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은 시민교육의 중심 화두(話頭)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시민이 지금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이 곧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