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에서 1950년대의 정치사는 다른 시기에 비해 연구가 미진한 편이다. 이 시기에는 이승만의 기라성 같은 행보들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야당이라 할 세력이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승만과 직·간접적으로 맞섰던 사람은 그게 김구든 여운형이든 생명을 채 부지하지 못했으니 두려웠을 법도 하다. 그런데 사사오입 개헌을 거치면서 드디어는 ‘反이승만’을 기치로 내걸고 본격적으로 정치 세력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민주당’이라고 부르곤 하는 정당의 효시가 된 바로 그 민주당이다. 1955년 창당된 민주당과 지금의 민주당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이합집산의 역사가 있지만, 이제는 누가 “민주당의 정통성을 가지느냐”고 따질 정도로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민주당의 창당 과정과 창당부터 내포될 수밖에 없었던 한계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민주당의 결성
11월 29일,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개헌안이 부결된 지 이틀 만에 이승만 정권은 의결 정족수를 반올림하며 억지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며 야당 의원과 자유당 탈당파 60여 명은 민주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호헌동지회를 만들었다. 12월 2일에는 민국당이 “당을 발전적으로 해산”하여 “신당발족과 동시에 당을 해산한다는 원칙에 찬의를 표명한다”는 입장을 표했으며, 같은 날에 재야계 인물들 역시 합류 의사를 보였다.
12월 6일 자유당의 소장파의원 손권배가 국회본회의에서 직접 탈당성명을 발표하고 12월 9일에는 자유당의원 20여 명이 개헌 파동을 이유로 탈당해 “야당측과 동일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호헌동지회의 활동에는 더욱 힘이 실리게 된다. 이후 호헌동지회는 12월 24일 신당 발기취지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신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에 착수한다.
그런데 여기서 조봉암의 신당 영입 여부를 두고 보수파와 ‘덜’ 보수파의 논쟁이 벌어진다. 조봉암은 이미 1952년 대선에서 2순위의 득표를 얻어 이름이 알려진 바 있는 인물이어서 실리적으로는 그를 영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조봉암 역시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정치권에서 다소 멀어진 상황에서 민주당의 결성을 계기로 자신의 위치를 재확립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자유민주파’로 통칭되는 당내 보수파들은 조봉암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의 영입을 거부했다. 조봉암이 공식적으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전향을 선언했음에도 자유민주파 의원들은 조봉암을 신뢰할 수 없다며 그의 영입을 꾸준히 거부한다. 이후 조봉암의 영입이 불발됨에 따라 민주대동파계열의 일부 인사들은 민주당에서 나와 진보당에 합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조봉암의 입당을 둘러싼 논쟁은 1월 초부터 두 달 간 지지부진하게 이어졌고, 이때부터 신당의 결성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가장 크게 언급될 만한 것은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로 갈라진 조봉암 영입 건이었지만, 이외에도 신당 결성 과정에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또 있었다. 1월 중순에는 민국당이 당원 53명을 신당발기준비위원(준위)에 넣겠다는 입장을 제시했는데, 신당촉진위원회 측은 단체교섭을 인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표했다. 신당의 성격은 합당(合黨)이 아닌 만큼 민국당과의 단체교섭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개별적으로 신청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준위의 최대 인원을 150명으로 한정한 상황에서 민국당으로부터 다수의 의원이 단체교섭 상으로 유입될 경우 신당에서 민국당의 힘이 너무나 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 사태는 결국 민국당이 종래의 입장을 포기하고 신당촉진위원회에 전권을 일임함으로써 종결지어졌지만, 준위 구성 방법을 결정하는 데에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더 소모하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발기취지문에 있던 “사회정의에 입각한 수탈 없는 경제체제”를 구현한다는 문구를 두고 보수 세력이 해당 문구가 사회주의 논리에 해당한다는 비판을 가하는 등 매카시즘에 가까운 논쟁 역시 이어졌다. 지금에 와서 보면 논쟁이라는 말조차 사치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10개월가량 겪은 끝에 1955년 9월 민주당이 출범함으로써 범야권 정당이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민국당 계열이 다수 합류했는데, 여기서 민국당은 저 유명한 한국민주당이 개편된 정당으로 한민당에서 이름만 바꾼 정당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보면 ‘민주당의 정통성’은 실상 한민당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민주당의 한계
민주당이 결성 과정부터 지니고 있는 한계는 명확하다. 자유당이라는 거대 악에 맞서 범야권 통합을 내세웠으나 본래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모임이어야 할 정당이 이승만에 반대한다는 생각만으로 모여들었으니, 이념의 차이로 서로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은 민주당 구성원의 대다수가 보수세력 일변도였다는 점이다. 조봉암으로 대표되는 혁신세력을 배제함으로써 진보라 일컬을 만한 구성원도 없던 와중에 자기들끼리 ‘이념’ 논쟁을 벌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민주당의 한계로 ‘같은 이념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일이 도리어 구조주의에 빠진 외람된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범야권을 통합한다는 명분이 무색하게 당시 가장 명망 있는 정치인 중 하나였던 조봉암을 배제시킨 것 역시 민주당의 주요한 한계점이다. 이는 나아가 오늘날까지 보수양당제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게 된 계기로도 작용했다. 민주당은 24정치파동 당시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진보세력을 대상으로 할 것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크게 문제 삼지 않았으며 진보당의 평화통일 정책을 비판하는 등 일정 영역에서는 자유당과 일치하는 모습까지도 보여준다. 
또 민주당은 진보당과의 단일화 협상마저 실패해 그들이 목적으로 삼은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지도 못한다. 결국 이승만 정권의 교체는 학생을 필두로 한 민중들이 이루어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었고, 이는 민주당이 정권 교체에 간접적인 역할만 한 무능한 정당이라는 꼬리표를 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신익희 사후 민주당이 운운한 ‘추모표’ 주장은 민주당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4월 혁명 때도 민주당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3·15 부정선거 이후 제1차 마산항쟁이 이어질 때도 민주당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합법적인 정치적, 법률적 투쟁을 주로 전개할 방침을 알리고 일부 야당 인사들이 시위에 가담할 뿐 중앙당 차원에서는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2차 마산항쟁 이후 지방 민주당원이 주도한 시위에서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는 주장이 더욱 자주 나타난다. 하지만 이는 지방 민주당원의 주장이었을 뿐, 민주당 중앙 지도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이승만의 사퇴를 요구하지 않고 있었다. 민주당이 이야기하던 ‘합법적’ 투쟁인 선거무효 소송은 4월 11일에야 제기되었다.
민주당은 야권의 통합을 목적으로 했으나 혁신세력 포섭에 실패했고, 정권 교체 역시 실패했다. 호헌동지회가 성립될 때만 해도 무소속 의원의 수가 약 80%를 차지했으나 점차 민국당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실상 한민당의 후신이 되는 과정을 거쳤다. 오늘날 계속해서 제기되는 야권 통합을 논하기에 앞서 1955년 민주당 창당으로부터 시작된 이합집산의 양상을 먼저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신당 추진 논의가 한창이던 1955년 1월 21일 《동아일보》에 기고된 칼럼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끝마치려 한다. "…야당세력 각개가 가진 이념을 창안해내야 할 것인데 이것은 극히 어려울 뿐 아니라 어떠한 결론을 얻는다 하더라도 명확한 내용을 가진 구체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요 가장 추상적인 공소한 형식적 관념적인 것을 내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의 취지서에 ‘일절의 비민주세력을 배제’하느니 ‘사회정의에 입각한 수탈 없는 국민경제체제를 발전’시키느니 하는 추상적 문구를 나열했고 하등 구체적인 것이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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