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는 일제강점기의 만주 수학여행과 그 곳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경험했던 바를 썼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반도 내에 경의선, 경부선 등 철도가 깔리고 조선에 일본인이 유입되면서 근대적인 여행문화가 조성됐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각지의 근대적 형태의 학교들은 일본 문화에서 유입된 수학여행을 실시했고, 이는 해방을 거쳐 오늘날에까지 이어진다. 이번 글의 관심은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시대의 수학여행에 있다.
우리는 1945년에 제국 일본이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독립을 맞이했고,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돌이켜 볼 때, 우리는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눈에 띄는 일제의 흔적들을 지워댔다.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공간, 모 학교의 교실만 보아도 액자형 태극기를 없애고 족자형 태극기를 걸어놓고 교단도 없앴다. 그렇다면 일본이 만든 수학여행도 없애야 할까? 눈에 보이는 제국 일본의 흔적들을 없애면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할 수 있을까?
박정희 시대 : 관광산업의 발달과 수학여행
시계태엽을 돌려 일제강점기를 지나 이승만 시대를 건너뛰고 박정희 시대를 살펴보자. 그의 치세라고 해서 수학여행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수학여행과 관련하여 박정희 시대에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이른바 ‘국민관광’ 시대가 열려 관광산업이 크게 발달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가 같은 독재자인 이승만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것이 결국 옳은 방식이었든 아니었든, 어쨌든 국가를 국가답게 운영해보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고, 관광을 좋은 수익사업으로 발견하는, 이승만은 떠올리지도 못한 기지(?!)를 발휘해냈다. 그는 설악산, 속리산, 한라산 등을 국, 도립공원으로 지정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호텔을 건축하여 관광지로 개발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관광의 콘텐츠가 될 우리의 문화재들을 대거 복원하고 정비했다. 박정희 시대 당시에 복원되거나 새로 조성된 문화유적으로는 아산 현충사, 남원 만인의총, 경주 일대, 강화도 전적지, 부산·충주의 충렬사 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수학여행은 전보다 선택지가 다양하고 그 내용물이 알차졌으니, 수학여행을 가는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박정희가 수학여행을 통해 학생들이 똑같은 행위를 하고 똑같은 경험을 하고, 똑같은 ‘무언가’를 배우길 바랐다는 것이다. 아산 현충사를 통해 이를 살펴보자.
현충사 성역화 사업과 반공 이데올로기
박정희는 친일파였고, 그의 역사관은 식민사학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5.16쿠데타 직후 1963년에 저술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타율적, 사대적이고 정체된 것으로 규정했고 이를 통틀어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속사’라고 부를 정도였다. 다만 박정희는 이순신만은 존경해야할 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순신을 좋아했던 것은 이순신이 일본과 싸워 이겼다는 민족적 감수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이순신이 개인의 힘으로 열등한 민족을 개조하는 영웅이었으나, 조선 민족의 고질적 병폐인 당파싸움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순신을 존경한 나머지 그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기에 이른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와 각종 기념사, 기자회견, 대회 연설에서 이순신을 언급하며 ‘왜군의 대륙침략 위협 = 북한의 남침위협’, ‘당쟁만 일삼는 조정 = 국론을 분열시키는 야당과 학생들’, ‘간신배의 모략에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의종군한 이순신 = 비판하는 세력들 속에서 과감한 실천을 해나가는 정부’라는 논리를 펼쳤다. 박정희는 자기 자신과 정권, 반공 이데올로기, 국난극복과 총화단결 구호를 정당화하는 데 ‘이순신’을 동원한 셈이다.
이에 박정희는 현충사를 ‘정화’할 것을 지시하는 데 이른다. 현충사는 숙종 32년인 1706년에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이에 따라 현충사는 1966년부터 1974년까지 4차례에 걸쳐 복원됐다. 아니, 그것은 복원이 아니라 ‘성역화(聖域化)’라고 불러야 마땅한 성질의 것이었다. 단순히 현충사라는 작은 사당을 원래 형태대로 보수한 게 아니었다.
공사의 결과, 먼저 현충사가 차지하는 경역(境域 : 경계 안의 공간)이 1차 공사 때 14만평에서 최종 42만평으로 크게 확장되어 크고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경역 내외의 전답과 민가들을 모두 정리하고 높고 화려한 본청과 유물관을 새로 세웠다. 입구 가까이 붙어있는 주차장이 현충사의 모양새를 망쳤으므로 주차장을 멀리 떨어뜨리고 크기도 5배로 확장시켰다.
박정희는 미국에서 이제 막 들여온 학문인 조경학(造景學)을 투입하여 현충사의 내부 경관을 꾸미도록 했다. 일본식 정원을 따라 동글동글하게 깎은 향나무를 기교적으로 심고, 자연석을 아기자기하게 쌓았다. 바닥은 잔디와 대리석으로 마감했고 한국 정원 문화인 정자도 두었으며 목가적인 분위기까지 가미시켰다. 이러한 조경 설계를 ‘박정희식 조경’이라고 한다. 여타 기념관, 기념공원 등에서 봤을법한 그 조경이 바로 이 조경이다. 한국 조경학은 박정희의 정치적 필요와 직접 지시에 따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조경학과가 설치된 게 그 시초다.
아무튼, 이러한 박정희의 ‘성역화’ 사업은 현충사의 공간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여 현충사의 분위기를 경건하고 성스럽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이 엄격,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이 본전 내부의 이순신 영정에 ‘참배’하도록 했다. 물론 ‘참배’는 역사적 실체 그대로의 이순신이 아니라 반공의 화신, 열등한 민족을 구제하는 영웅으로 재해석된 이순신에게 바쳐졌다.
그러한 점에서 현충사는 ‘참배’를 통해 개인에게 반공, 군사, 민족 이념을 학습시키는 일종의 교육장이었다. 이곳의 풍경과 구조, 조경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 의례행위는 투명하게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설계’된 것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현충사는 하나의 문화유산, 사적 155호라기보다는 이순신(유사 박정희)이라는 민족 영웅을 모신 ‘성소(聖所)’, 민족의 성전(聖殿)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수학여행 : 민족의 성스러운 공간에 학생을 배치하기
지금까지 현충사가 민족의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어져가는 과정에 대해 길게 이야기 했는데 사실 이런 성소가 한 둘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경주 통일전, 남원 만인의총, 부산·충주의 충렬사, 강화도 전적지 등을 포함한 약 30여 곳의 사적지들이 ‘성역화’됐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등장하는 것이 수학여행이다. 박정희 정부는 서울로 집중되던 수학여행지를 확대하여 현충사, 통일전, 만인의총 등 지방 각지의 성소로 수학여행을 가도록 지침을 내렸다.
그렇게 수학여행 버스는 성소(聖所)들로 학생들을 열심히 실어 날랐고 학생들은 열심히 통일전에서 ‘서원’하고 만인의총에서 ‘묵념’하고 현충사에서 ‘참배’했다. 현충사의 경우 1980년대에 연 인원 1천만 명의 참배객을 맞이했다.(오늘날 전주 한옥마을 연 방문객이 500만 명이다) 이렇게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 의례행위는 수학여행(국민관광)과 결합하여 정부의 반공, 통일, 군사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매커니즘을 형성했다. 이렇게 볼 때 성소(聖所)와 수학여행은 마치 어떤 이데올로기를 찍어내는 공장의 한 부품처럼 보인다.
지워야할 식민지의 유산 : 파시즘
우리는 지난 글에서 일제강점기의 수학여행을 살펴보았고 따라서 조선총독부와 박정희의 수학여행이 같은 매커니즘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학여행은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시대를 통틀어 군사주의, 전체주의, 반공주의, 민족주의를 개인에게 전달하고 사회 전반에 배포했다. 이와 같이 전체주의 성향의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그 이외의 사상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성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분명 제국 일본은 파시즘 성향을 띠고 있었고 박정희는 그 시대에서 군사문화를 추종하고 친일을 자처했던 사람이다. 박정희는 일제가 저지른 파시즘적 실천들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국민교육헌장은 황국신민서사에서, 새마을운동은 농촌진흥운동에서 배웠다. 박정희가 조선총독부와 같이 수학여행을 파시즘을 생산하는 공장의 ‘부품’ 쯤으로 이용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수학여행이 일제강점기에 비롯된 식민지의 잔재이므로 없애야 한다는 논리는 아니다. 수학여행은 파시즘을 생산하는 매커니즘의 한 ‘부품’이었을 뿐이다. 오늘날 수학여행에 ‘부품’으로서의 ‘수학’은 없고 ‘추억’만이 남아 있다. 결국 그들이 남긴 보이지 않는 유산은 파시즘이었다. 우리는 두 편의 글을 통해 제국 일본이 남긴 파시즘이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 생명을 연장했음을 ‘수학여행’이라는 미시적 사례를 통해 알아본 셈이다.
우리는 비단 수학여행 뿐 아니라 언론, 교육, 직업 등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알게 모르게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왔다. 물론 파시즘의 영향은 나날이 축소되고 있다. 현재 현충사 방문객은 영화 ‘명량’으로 잠시 급증했으나 대체로 100만 명이 안 된다. 굳이 수학여행으로 현충사를 가라고 강요받지 않는 시대가 됐다.
오늘날 왜 정부는 국민의 사상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 집착하고, 일부 기성세대는 수백 학생들의 죽음보다 대통령의 국정 추진력이 우선이고, 남자는 군대에 다녀와야 사람이 되고, 학생들은 아직까지도 청소년 수련원에 가서 유사 군사 행위를 학습해야 하는 걸까? 박정희 정부는 우리 사회에 군사 문화, 전체주의, 반공주의 등 파시즘을 퍼뜨렸다. 그의 시대는 어느 대통령의 치세보다도, 심지어 이승만의 시대보다도 제국 일본을 닮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