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으로서의 교육학은 교육이라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관점을 갖추어 우리의 삶의 전반에서 펼쳐지는 교육의 양상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하여야 함을 앞선 시간을 통해 밝혔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학’은 교육을 설명할 수 있는 내부 설명체계가 없으며 타 분과 학문의 내용을 빌려와 교육을 설명하려하는 잡학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자율적이지 못한 접근은 교육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심리학의 눈으로 파악된 것은 심리 현상이지 교육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사회학, 철학의 눈으로 파악된 것도 교육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은 시작부터 모순을 안고 있다. ‘교육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파악해야 할 대상세계 즉 교육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상식 수준에서 파악된 ‘교육’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타 학문 체계의 개념과 논리를 가져다 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은 교육과 교육이 아닌 것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상식적으로 파악된 교육은 배우고 가르치는 행위, 지식의 전달, 인간 행동의 변화 등으로 결과론적으로 정의되는데 이는 교육을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 환원하며 그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모두 교육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교육의 본질이 과연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에 있는가에 대한 고민 없이 학습, 교수, 교수방법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학교는 교육을 위한 공간임을 전제하는 것 또한 개념의 모호함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학문과 교육에서는 학교와 교육의 혼동하는 것의 문제를 지적한다. 하나의 생활세계로서의 학교는 내부에 다양한 삶의 양상이 혼재하며(p.135) 교육은 삶의 한 양상으로서 하나의 동질성을 갖춘 세계(p.135-136)이기에 같은 범주에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교육은 개인의 생 전반에 걸쳐 일어나지만 학교를 교육이라 착각할 경우 학교 외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주목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학교 선생님을 배움을 주는 사람, 교육자 등으로 고정시키는 오류를 낳을 수 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교육이라 오도하는 것 또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과 교육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하나의 세계로서의 교육에는 어떠한 동질성과 내재율이 존재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이라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독특한 체험구조는 정치, 경제, 종교 등의 다른 세계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이를 규명하는 것은 교육을 자율적으로 바라보고 그 본질에 조금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무지의 자기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 경제, 종교 등의 세계와 교육이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타 세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정의하여야 하는데, 교육을 정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결과론적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만으로 그 대상세계를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타 세계를 정의하지 않고 그 중 어떠한 특성으로 보이는 일면적인 것을 가지고 오는 것 또한 대상 세계를 왜곡할 소지가 있다. 더불어 나 자신은 교육이 아닌 다른 대상 세계에 대해서 상식 이상의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다. 학문에서 바라보는 대상세계는 단순히 상식으로 파악한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터, 이러한 무지 상태에 놓인 내가 교육과 교육이 아닌 것을 구별하고 판단한다는 것이 지적인 오만은 아닐까. 질문만 가득 안고, 스스로의 무지를 안타까워하며 글을 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