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존재 결정권 보장 목적으로 긍정적 평가 있으나 사업자에게 부과된 판단·결정 커 부담

지난 25일 서울 양재 더K호텔에서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 주최, 한국인터넷진흥회 주관으로 (가칭)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 가이드라인(안)」 세미나가 열렸다. 이는 ‘인터넷상에 게시된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삭제해 달라고 요구해, 해당 자료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인 잊힐 권리 보장을 위한 가이드라인 제정의 마지막 의견 수렴 절차로 법조계, 학계, 기업, 시민단체 등 다양한 단위의 입장을 듣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방통위 이기주 위원장은 인터넷 이용자가 36억 명에 달하는 현실을 언급하며 “인터넷 이용자의 잊힐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하는 지침이 필요하다”며 가이드라인 제정의 이유를 밝혔다. 세미나는 이 위원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정준현 단국대 법대 교수의 가이드라인 내용 설명 ▲토론자들의 공개토론 ▲플로어 질의·답변 순서로 진행됐다.

◇ 세계적 화두 된 ‘잊힐 권리’와 한국에서의 논의 상황
2010년 스페인의 변호사 곤살레스는 12년 전 빚 때문에 자신의 집이 경매에 부쳐진 사실을 구글 검색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 사실이 자신의 직업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해 해당 언론사에 관련 기사를 수정·삭제할 것을 요청하고, 구글에는 검색 결과를 감춰줄 것을 요청했다. 정보 보호 당국은 언론사가 기사를 수정·삭제할 의무는 없으나, 검색 서비스 사업자는 검색결과에서 해당 사실이 보이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고 보아 구글이 곤살레스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반발한 구글은 유럽사법재판소(ECJ)에 재판을 청구했으나 2014년 재판소는 곤살레스의 손을 들어줬다. 잊힐 권리를 정식 인정한 ECJ의 이 판결로 잊힐 권리는 세계의 화두로 떠올랐고, 유럽연합에선 관련 입법화가 진행 중이다. 한국에선 작년 10월 강원도가 잊힐 권리를 도 조례로 제정해 국내 최초로 잊힐 권리가 법제화된 바 있다.

◇ 방통위 가이드라인의 등장배경과 내용
이날 가이드라인의 내용을 소개한 정준현 단국대 법대 교수는 “특정 게시물을 작성한 개인이 마음이 진정되거나 열정이 사라진 뒤 돌아보았을 때 과거 자신의 표현물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을 수 있다”며 이번 가이드라인이 저작권자로서 자기게시물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지침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본인의 개인정보가 드러난 게시물을 삭제하거나 공개되지 않도록 하고 싶은 자, 즉 접근배제 요청권을 행사코자 하는 자는 우선 해당 게시판 관리자에게 게시물에 대한 타인의 접근을 배제해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이에 더해 검색 포탈 등에서의 결과가 즉시 배제되길 원하는 경우 검색서비스 사업자에게도 검색목록에서 해당 게시물이 보이지 않도록 요청할 수 있다. 요청을 받은 게시판 관리자는 블라인드 처리 등의 방법으로 조치를 취하고, 검색서비스 사업자의 경우 인터넷 캐시를 삭제하는 방법으로 해당 게시물이 표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편 해당 게시물의 실제 주인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등 이해관계가 있는 제3자가 배제된 정보를 재공개할 것을 사업자에게 요구할 경우, 사업자는 그 주장에 대한 증거가 인정되는지 자체적으로 판단해 정보 재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한편 ‘잊힐 권리’를 주장하며 접근배제를 요청한 게시물이더라도 공직자, 언론기관 관계인 등 공익과 상당한 관련이 있는 게시물일 경우 사업자가 해당 요청을 거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가이드라인에 대한 적지 않은 우려들
방통위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이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하고 있다. 각계에서는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보장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현행 관련법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 ▲검색서비스 사업자에게 과도한 부담이 가해진다는 점 ▲알 권리, 표현의 자유 등 기존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큰 점 ▲복잡해진 인터넷 환경에서 가이드라인이 제시하는 게시판과 자기게시물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들며 비판을 제기했다.
가천대학교 최경진 법과대학 교수는 “앞으로 개인정보와 관련된 게시물의 삭제 요구가 증가할 건 분명해 보이나 현행법에서도 충분히 수용 가능하다”며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기존 법을 충분히 안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이상직 변호사는 “아동, 청소년,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경우 적법한 제3자의 게시물로도 일상생활에서 고통을 겪을 수 있다”며 “현행법상 적법한 타인의 게시물에 대한 삭제, 검색배제(블라인딩)를 요구할 수 없어 사회적 약자가 사각지대에 놓일 위험이 큰 만큼 속히 잊힐 권리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잊힐 권리 전문 기업인 주식회사 산타크루즈 역시 이날 세미나가 끝난 뒤 서면으로 “잊힐 권리 의뢰자의 절반 이상이 청소년”인 상황을 소개하며 청소년의 경우를 배려한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게시판 관리자, 검색포탈사업자(이하 사업자)에 대한 책임이 과해진다는 목소리도 컸다. 현재 안에 따르면 이용자가 특정게시물에 대해 삭제·접근배제를 요청한 경우 게시판 사업자는 이에 응해야할 책무가 있으며, 탈퇴회원인 경우에도 과거 회원 시절 해당 게시물의 작성인임을 ‘유추 가능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지체 없이’ 판단·결정해 요청에 응해야 하는데 이는 사업자에게 고도의 규범적 판단력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SK 텔레콤 직원 김태열 씨는 “현재는 고객이 개인정보나 관련게시물 삭제를 원할 경우 즉각적으로 요청에 응하고 있다”며 자기게시물 자기결정권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한 반면 “개인정보가 사측에 남아있는 않은 탈퇴 회원의 경우 본인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며 탈퇴회원의 권리까지 보장하는 것은 사측에 부담이 되는 처사라고 말했다. 이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오병철 교수는 “계약관계가 종료됐다 하더라도 기존 계약관계에서의 미해결 법률관계를 주장할 수 있다”며 “과거 이용자 시절의 권리가 남아있으니 사측은 탈퇴 회원의 요청에 응할 책임이 있어 보인다”고 답했다.
이외에도 이번 가이드라인은 제3자의 게시물이 아닌 본인이 작성한 게시물에 대해서만 삭제·공개배제 요청권이 적용돼 본래 보장돼 마땅한 자기정보공개결정권을 확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상직 변호사는 “제3자의 게시물에 대해서도 잊힐 권리를 중시하는 유럽의 논의에 비해 매우 후퇴한 방안”이라며 이번 안은 제3자를 대상으로 하는 잊힐 권리와 관련이 없다고 했고,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차재필 실장은 “이 같은 가이드라인은 세계적인 유례가 없는 것으로 국민들 사이에서 불편이 폭발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자칫 성급한 도입일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방통위 이기주 위원장은 이날 제기됐던 문제들을 짚으며 “이번 가이드라인을 두고 잊힐 권리에 관한 것이 아니며 반쪽짜리 논의에 불과하다는 얘기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당장 법적 강제성이 있는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피해를 입는 이용자가 생긴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방통위 역시 신중히 접근할 것이나 관계자들께서도 완벽한 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이용자인 대다수 국민들의 피해를 구제한다는 측면에서 가이드라인에 협조·접근해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저작권자 © 한국교원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