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 지나치게 매몰된 한국 사회 인문학의 위기 불러와, 올바른 인문학적 성찰이 해결 방안
Q. 인문학의 위기, 전 세계적 경향이다. 특정 국가 내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 만큼 인문학의 경시 현상이 전 인류적 차원의 변화 양상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원인은 무엇인가.
가장 큰 원인은 인문학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한 시대가 변화하고 있는 시기이다. 현재 후기 자본주의, 산업사회 즉 후기 근대라는 이야기인데 근대는 17,18세기에 서구 사회가 전 세계의 규범이나 체계를 결정한 시기이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혁명, 여러 가지 계몽 혁명을 통해 현재 체제들을 성립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근대에 형성된 사회 체제들은 2차 대전과 산업화를 지나면서 지금은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포스트 모더니즘, 탈근대, 해체주의 등이 이러한 시대를 벗어나고자 한 철학적 탐색이 되겠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함에도 인문학은 본연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 변화된 시대에 대해 대답을 해야 하고 변화된 사회에 대한 해석이 필요함과 동시에 일반인들이 원하는 변화는 시대에 대해 듣고 싶어 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인문학적 성찰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는 자연스레 인문학의 힘을 잃게 하는 요소가 돼버린다.
한편으론 자본주의가 현재 너무 과잉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도 인문학의 위기에 한 몫을 한다. 자본주의는 사실 한계에 도달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2012 다보스 포럼에서도 자본주의 이후의 경제 체제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은 결국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며 인문학 역시 상품으로 인식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것이고 소비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시스템 인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인문학 본연의 본질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한다.
Q. 하지만 한국의 경우 유독 인문학에 대한 경시 풍조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최근 취업률을 기준으로 대학의 학과 통폐합을 자행하던 몇몇 대학의 행태는 많은 대학생들로 하여금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요. 정부의 지원도 인문학 분야보단 과학, 기술 분야에 치중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선 정부가 대학을 보는 시선부터 잘못됐다. 지난 10월 교육부는 사회변화·산업수요에 맞는 인력양성을 위해 ‘사회수요 맞춤형 인재양성 사업' 기본계획 일명 ’프라임 사업‘의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교육부에서 요구한 사회수요에 따른 대학 구조조정 및 개편 시 지원금을 지급한다는 것이 사업의 주요 내용이다. 이는 교육부가 얼마나 대학의 역할을 잘못 이해하고, 교육을 이해 못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사회 수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그럼에도 사회 수요에 맞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을 바꿔나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언론에선 변화한 시대에 언제까지 학문을 붙잡고 있을지를 얘기하는 상황이다. 정말 개탄스럽다. 기초 학문이 무엇이란 말인가. 노벨상을 그토록 외쳐대지만 기초학문이 없이 노벨상 수상이 가능할까. 프라임 산업은 결국 산업과 연계해 대학을 기업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인문학의 경우에도 인문학 지원 사업 일명 코어 사업도 함께 제시됐다. 예산은 대략 340억 책정됐다. 역시 대학의 구조를 개혁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며 철학을 다른 학문과 결합시켜 새로운 학문의 개발을 지시한다. 결국 실질적인 인문학의 발전과는 거리가 먼 정책인 것이다.
일단 교육부가 이러한 정책을 주도하는 것 자체가 철저히 자본과 결탁한 이해관계에서 교육 행정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자본과 기업이 잘 돌아가야 하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는 세계의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에 휩쓸려 이외의 가치들을 무시당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상당히 위험하다. 사람이 자본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기업에 취직해서 일 하는 이유는 결국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삶을 번 돈으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인 자본이 목적이 돼버렸다. 이러면서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에 휩쓸려 한쪽에 편향되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은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관료들 역시 기업의 요구와 정치인의 요구에 따라서 대학에게 기업에 중점을 맞춘 대학을 강요하는 것이다.
Q. 2006년 고려대 인문학 교수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한 것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것으로 압니다. 대학 간의 서열, 부조리한 구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서 인문학의 위기의 숨겨진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위기 선언들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06년의 경우 고려대에서 선언했지만 그전에도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선언이 있었고, 최근에도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다. 인문학이 위기인 것은 사실이나 이때마다 정부가 인문학의 지원을 약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위기 선언에 대한 당위성이나 정당성과는 별개로 인문학의 현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결국 당시 고려대 인문학 위기 선언에 대한 비판도 인문학의 위기를 수단으로 이용해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이익을 보는 현상을 비판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은 정말 큰 문제가 있다.
대학의 서열화 역시 또 다른 문제이다. 요즘 수능 한, 두 문제로 등급이 나뉜다. 등급은 누가 정한 것인가. 등급 대로 서열화 된 대학에 들어가게 되는 현재 시스템에 따라 결국 대학의 지원 정도 역시 달라진다. 이는 결국 메이저 대학을 제외하고선 지방대나 여타 대학 내에서의 인문학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Q. 조금은 진부한 질문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인문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왜 인문학이 경시돼서는 안 되는지, 왜 인문학에 소홀해져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한 소견 부탁드린다.
인문학의 가치는 되레 가치를 넘어선다는 데에 있다. 조금은 어려운 말이 될 수 있겠지만 니체가 독일 19세기 유럽 문화를 비판하며 니힐(허무주의)이라고 했다. 그의 견해는 대략 소크라테스적인 전통이 이어져 오는 유럽 문화의 끝이 결국은 허무주의로 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린 여기서 허무주의의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허무주의는 쉽게 말해 최고의 가치가 탈가치화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결국 어떤 대상을 가치로 따지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어떤 대상을 가치로 따질 때, 대상의 가치가 상실할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가치의 문제에 집착하는 문화는 결국 탈가치의 문제가 생기고 결국 허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
다시 인문학으로 돌아와 인문학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인문학의 가치를 상품성으로 본다면 허무주의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도 결국 니체의 말처럼 무가치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가치를 넘어서는데, 가치 문제가 무엇인지를 비판하는데, 또 그것을 돌아보면서 정말 사람에게 의미를 주는 작업을 할 수 있는 학문이기에 진가를 발휘한다.
한편 모범적인 답안으로는 삶의 결 과 무늬를 성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을 살펴보자면, 삶의 결이란 결국 규범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 삶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것 그게 인문학의 가치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가치를 설정하고 가치관을 설정하고 묻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우리가 느끼는 참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인문학의 기능이다.
Q. 마지막으로는 ‘위기의 인문학’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다방면에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보다 근본적이고 확실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정부의 노력인가요? 아님 시민들, 학생들의 자발적인 노력인가요. 인문학이 웃을 수 있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가장 직접적이고 가까운 대안은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적 성찰적 작업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파악하고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우리나라 학문의 경우 굉장히 식민지 적이다. 종속돼 있다. 이 역시 5, 10년 주기로 매번 제시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지식의 상당 부분이 외국의 지식에 기준을 두고 있다. 우리가 자생적으로 한국의 담론을 만들어내는데 전념해준다면 문제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있다. 95년 방한한 하버마스의 일화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버마스가 95년 방한했을 당시 국내 유수의 학자들과 함께 담론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담론을 마친 후 마지막에 한국의 학자가 하버마스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의 생각으로는 한국의 이러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하버마스는 정직한 학자였다. “나는 내가 속한 사회의 일원으로 담론 윤리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한국의 문제는 당신들이 논의해야 할 문제인데 왜 나한테 묻는가”. 이는 우리나라의 학문 자체가 진리 기준을 외국에 두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시가 된다.
두 번째로는 국민의 변화이다. 얼마 전 본 자료에 의하면 1년 동안 책 한 권 안 읽는 사람의 수가 전체 국민의 40%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출판 시장이 상당히 강한 편에 속하는데 비해 사람들의 책에 대한 관심은 떨어진다. 일반인들이 스스로 인문학적 성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자각하고 계몽되고 스스로 자율적인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자긍심, 바람,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가 이뤄지면 역사 뿐 아니라 모든 사회 시스템이 아래의 요구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듯 인문학에 대한 사회 체제의 긍정적 변화도 기대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