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상은 한국사회 고용의 질 보여주는 지표. 법 잣대 들이대기에 앞서 빈민 생존권 보장해야

▲ 분식 노점을 하는 김기순 씨.

지난 14일 서울에선 농민·빈민·장애인·성소수자·청년 등 다양한 단위가 참여해 밥쌀 수입 저지·노점단속중단·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등을 요구한 민중총궐기 대회가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 없던 청와대를 경찰은 물대포와 캡사이신 등을 사용해 가며 결사 옹위했고, 총궐기대회가 끝난 뒤엔 의식불명의 농민과 경찰의 과잉진압, 폭력시위만이 논의대상이 됐다. 이날 서울엔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제대로 살고 싶다고 입을 모았으나 그들의 목소리는 저 밑으로 가라앉았다. 총궐기에 참여했던 수많은 단위들, 그중에서도 노숙자, 장애인과 함께 도시빈민으로 모여 목소리를 냈던 노점상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먼저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이자 민주노점상전국연합의 사무처장인 최인기 씨의 말이다.

기자(이하 ‘기’): 어떻게 빈민, 노점상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게 됐나.
최인기(이하 ‘최’): 85년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곳 을지로에서 반지세공자로 일했다. 알다시피 노동운동,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에 청년단체를 방문했다가 소위 ‘나쁜 형들’을 만나(웃음) 책도 보고 시위를 다녔다. 그렇게 90년대엔 구로공단에서 일했고, 95년 이덕인 열사를 만나 노점상 운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지금껏 이어져 20년을 넘기고 있다. 이덕인 열사는 지금은 매립돼 없어진 인천 연수구 아암도 바닷가에서 노점을 했던 장애인이다. 노점상 단속에 맞서 망루에 오른 그에게 철거 용역은 소방차를 동원해 물대포를 쏘아댔고, 망루에서 떨어진 그는 이틀 뒤 변사체로 인천 앞바다에 떠올랐다. 어젠(11월 25일) 이덕인 열사 기일이어서 인천으로 추모제를 다녀왔다. 

기: 노점상의 역사는 어떤가.
최: 노점상은 우리 사회에서 오래된 상업 형태다. 불법화되기 시작한 건 근대 법체계가 만들어진 이후로,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노점상은 보통 사회가 바뀌는 과정에서 생긴다. 우리나라의 경우 7,80년대 도시화·현대화 되며 농촌 경제가 붕괴됐는데 당시 노점상은 붕괴된 농촌과 지방에서 온 분들이 많았다. 특히 전라도 분들이 많았는데 인구도 많고 농촌 지역이 많았기 때문이다. 90년대엔 IMF가 터져 직업이 있던 사람들이 노점상으로 전락했고 그때부터 노점 상인들은 고학력화, 저연령화 되고 있다. 기존에 상가를 가졌던 사람이나, 노점을 하던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사람, 사업을 하다 실패한 사람 등 다양하다.

기: 노점상은 현행법상 그래도 불법이 아닌가.
최: 그렇다. 도로교통법, 식품위생법에 저촉된다. 그러나 정부의 시선에 따라 달라져 노점상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다. 버스카드 충천소와 구두 수선집은 노점상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정부가 인정한 ‘가로가판대’에 속한다. 한편 행정청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불법 형태의 노점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과 사회구조를 먼저 알아야 한다. 경제가 튼튼할 때 노점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지금 모습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방증하고 있으며, 이를 감추고 억압하기보다 근본 원인인 열악한 고용·노동 형태를 해결하려 해야 할 것이다.

기: 이곳 민주노점상전국연합(이하 민노련)에선 어떤 일을 하나
최: 노점상들의 생존권과 단결권, 그리고 인권보호를 위한 업무를 한다. 구체적으론 단속이 있을 때, 구청·시청을 상대로 항의하고 면담을 신청해 지역 차원에서의 대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 강남구청의 경우 상생위원회를 만들자는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 ‘모든 노점상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이와 달리 다른 구청은 나름대로 상생의 노력을 한다. 노량진의 경우 작년에 기존의 노점거리를 한 블록 옆으로 옮겼는데, 차량막 공사와 전기·수도를 지원해 노점상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기: 노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최: 무엇보다 중요한건 1차적인 사회 안전망을 확보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고용의 질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민노련은 우리와 비슷한 약자인 노동자, 장애인과 함께 사회의 구조 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한편 우리 노점상 측에서도 노점상의 시각적·위생적·환경적인 문제를 간과해선 안 되며, 자생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다.

민노련 사무실이 있는 건물 바로 아래서 김밥과 토스트, 어묵 등 분식을 팔던 김기순(을지로·58)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과 93세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김 씨는 5시에 일어나 7시에 이곳 노점에 도착하고, 저녁 6시에 집에 들어간다. 20년간 노점 장사를 해온 그녀는 많은 일을 겪었다. 건너편 롯데 건물 앞에서 포장마차를 할 땐 ‘1년에 100번은 더 단속을 당했고 하루에 두 번 리어카를 뺏긴 적’도 있다. “떡볶이 팔던 리어카를 용역이 모조리 때려 부쉈지. 제일 악랄한 데가 여기 중구청이야. 구청 직원들, 여기 민노련에서 가서 항의하고 협의해서 이제 안 그러겠다고 약속하는데 그럼 뭐해. 다 말 뿐이고 매번 때려 부수는데. 공무원들은 법, 약속 안 지켜도 돼?”
그녀의 노점이 가장 장사가 잘 되된 때는 20년 전의 포장마차 시절이었다. 두산 위브 건물 공사가 한창이던 그때, 새벽부터 공사판의 인부들을 해먹이며 한 달에 200-300만 원을 벌었다. 작년에 들어온 이곳 박스 노점에선 150만 원을 벌고 있으며 메르스가 강타했던 지난 여름엔 50만 원을 벌까 했다. 그래도 지금의 박스 노점에 그녀는 만족하는 듯 보였다. “지금은 살만해. 저기 평화시장부터 여기 내가 있는 의료원까지가 관광특구로 지정돼서 노점들 50개 정도는 박스까지 차릴 수 있었어. 서울시랑 중구가 합의한 건데 허가까진 아니고 인정해준 거야. 이 박스는 1000만 원에 샀고, 매달 30만 원씩 3년 간 내야 해.”
“먹거리는 물, 전기가 가장 중요해. 근데 노점은 그게 안 되니까 고생스럽지. 포장마차 할 때 네모난 사각 간장 통에 물을 담아서 열 몇 개씩 리어카에 담아 날랐는데 그렇게 5년 하니까 허리가 망가지더라고. 지금은 돈 내고 옆 건물에서 물 받아서 쓰고, 이 박스에 계량기를 달아서 전기까지 들어오니까 참 좋아.”
버스 정류장 앞에 위치해 버스가 출발 할 때마다 나는 소리는 바로 옆의 말소리를 곧장 잡아먹었다. 도로변에 있어 너무 시끄럽진 않냐는 물음에 김 씨는 “그건 벌써 예전에 졸업했지”하고 별거 아니란 듯 답했다.

우리학교에 첫 눈이 내렸던 이날(26일), 서울 동대문구에도 눈이 흩날렸다. 도저히 바깥에 못 있겠다 싶은 날씨였지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13번 출구엔 난로는커녕, 바람을 막을 천도 없이 그대로 드러난 노점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김기순 씨에게 인사를 하고, 그 옆의 노점으로 발을 옮겼다. 가판에 생필품을 늘어놓고 파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니 고개만 연신 젓는다.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글로 전하면 될까 공책을 펴니 또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한다. 그 사정이 더욱 궁금했으나, 가만히 있다 조금 더 옆의 할머니에게 몸을 돌렸다. 맨투맨과 후드티를 쌓아 놓고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한 청년이 “이건 2만 5천원”하며 옷 몇 벌을 가져다 놓는 중이었다. 다가가 말을 거니 늙은이한테 뭘 물어보고 타가려 하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손자라고 밝힌 청년은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저작권자 © 한국교원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