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네덜란드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원래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공부를 했다. 그러나 여러 어려움을 겪은 후,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1881년 12월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흐는 1890년 에 자살하기 전까지 약 9년간 879점의 작품을 남겼다. 37년 의 짧은 생애였지만 고흐가 남긴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타히티의 여인들’로 유명한 폴 고갱과의 동거다. 1888년 2월 노란 집이 있는 아를에 도착한 고흐는 같은 해 10월부터 고갱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고흐와 고갱이 심하게 다툰 후, 고흐는 면도칼 로 고갱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결국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 고 고갱은 고흐를 입원시킨 후 파리로 급하게 떠났다. 고흐가 고갱과 같이 살게 된 배경에는 화가 공동체를 만들 겠다는 고흐의 바람이 있다. 고흐는 화가들의 생계와 지속적 인 활동 보장을 위해 화가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다. 또한 그 는 아를에 있는 자신의 노란 집을 아틀리에로 만들어 화가 공 동체의 거점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고흐가 생각한 화가 공동 체는 자신의 그림의 소유를 공동체 소유로 하고, 그림을 판
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의 이런 꿈 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고흐가 화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화가들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를 보면 ‘화가 공동체를 만들어서 그림 판 돈을 나누어 갖자 고 화가들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화상과 미술 애호가들을 설 득해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사도록 하는 게 더 쉬울지 도 모르겠다’라고 적혀있다. 이 부분을 통해 고흐가 화가들 을 설득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흐가 화가 공동체를 만들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고흐가 환각증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고갱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귀 를 자른 고흐는 병원에서 2주간 입원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퇴원 이후에도 여전히 환각증세를 보였다. 고흐는 결국 주민들의 신고에 의해 1898년 3월에 병원에 강 제로 입원한다. 이렇듯 고흐 자신이 건강하지 못하니 어떻게 화가 공동체라는 꿈을 이룰 수 있겠는가. 고흐는 작품을 공동체가 소유하고 그림 판 돈을 나눠가져 공동체 회원들의 생계와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보장하는 형 태의 화가 공동체를 꿈꿨다. 그러나 고흐는 결국 다른 화가들 의 반대와 정신적 문제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고흐가 화가 공동체 계획을 성공했다면 그의 형편이 조금 더 나아지 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 기자명 박소연 기자
- 입력 2015.10.06 17:01
- 수정 2016.09.21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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