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학교, 일터를 수평화하자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는 ‘갑의 횡포’라 불리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대리점 지점장에게 폭언을 한 남양유업 본사 직원, 역시 대리점주에게 물건을 강매한 배상면주가, 항공기 승무원을 폭행한 포스코 임원과 호텔 직원을 폭행한 중소기업 사장, 편의점주에게 매우 불리한 계약을 강요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횡포를 부리는 프랜차이즈 대기업, 그리고 젊은 여성 인턴을 성추행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까지. 하나같이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도를 넘는 행패를 부리는 유형을 보이고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사건들을 단순히 도덕성이 떨어지는 개인의 일탈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자꾸 발생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위의 사건들만을 보면 ‘갑의 횡포’는 주로 기업계와 정계의 문제라고만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소지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국의 뿌리 깊은 수직적 문화는 가정과 학교를 비롯한 일상에서도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체질화되어 있다. 요즈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갑-을’의 관계를 ‘상사와 부하직원’이나 ‘대기업과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선배와 후배’, ‘교사/교수와 학생’, ‘남성과 여성’(데이트 비용을 계산할 때에는 반대로 여성이 ‘갑’이 된다), ‘한국인과 외국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정권과 시민’에도 대입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옛날에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던 운동권이나 노동조합, 여성운동계에서조차 수직적 문화가 존재한다. 최근 ‘일간베스트’라는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들이 ‘민주화’라는 용어를 ‘다수가 소수의 견해를 묵살한다’라는 뜻으로 비꼬아 사용한다고 해서 논란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데는 과거 민주화를 주장했던 운동권들이 빌미를 제공한 면이 있다. 운동권들 사이에서, 주류 다수와 다른 의견을 내거나 리더 그룹을 비판하는 소수를 다시는 입도 뻥끗하지 못하게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화’를 위한 단결된 투쟁 행보의 대오를 흐트러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블루칼라 남성들이 중심이 된 한국의 노동조합 내에서도 그들의 투쟁의 대상인 기업들과 다를 바 없는 ‘군대식 조직문화’가 존재한다고 하며,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성운동계에서도 ‘선배’, ‘언니’ 운운하면서 앞 세대들의 견해를 좀처럼 비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특정 대학 출신들이 선후배간 카르텔을 형성하여 여성운동계의 ‘이너 서클’이 되어버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수직적 문화가 가져오는 일사불란함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수직적 문화는 필연적으로 억압, 착취, 소외를 수반한다. 수직 구조의 계단에서 맨 아래에 있는 사람은 가장 힘든 일을 짊어지지만 중요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는 소외된다. 또한 상급자도 사람이기에 오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데, 상급자의 판단에 대해 비판과 성찰, 대안 제시를 할 수 있는 언로가 없으면 상급자 한 사람의 실패가 곧바로 조직 전체의 실패가 되어 버린다. 게다가 상급자가 제멋대로 일을 해도 비판할 수 없는 구조는 법과 원칙이 무시되고 비리와 부패가 일어나기 쉬운 온상이 되기도 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가정, 학교, 일터와 같은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영역을 ‘생활세계’(Lebenswelt)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은 그가 ‘공공영역’(Oeffentlichkeit, 영어 public sphere)이라고 이름 붙인 제도권 민주 정치와 시민사회에 대비시켜 만든 개념이다. 한국 사회는 부단한 민주화 운동을 통해 ‘공공영역’은 민주화되었지만, ‘생활세계’에는 여전히 예전의 수직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한국을 어느 정도 아는 서양인들은 자주 이 둘의 괴리를 토로하곤 한다. 예를 들어 뉴욕대 스턴비즈니스스쿨 교수인 다니엘 알트만은 저서 <10년 후 미래>에서 “한국은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업의 연공서열 폐지와 혁신을 반대하는 유교 문화를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를 비롯한 여러 외국인들의 말에 따르면 일본 정도만이 수직적 문화에서 한국과 견줄 수 있는 정도고,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현장에도 이런 정도의 수직적인 문화는 없다고 한다. 본래 ‘갑과 을’이란 계약서를 쓸 때 나오는 용어이지만, 한국에서는 동등한 계약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닌 을에 대한 갑의 봉건적이고 전제적인 지배를 내포하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생활세계’에서의 개방성과 포용성의 퇴보는 ‘공공영역’에까지 해를 끼치곤 한다. 최근의 윤창중 사태는 ‘지위를 가진 나이든 남성은 어린 여성을 마음대로 대할 수 있다’라는 우리 사회 일각의 잘못된 인식이 국가 망신까지 시킨 사례다. 뿐만 아니라 국가가 시민 위에 군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고를 가진 이들(조갑제 등)이 공공영역에서 활개를 치기도 한다. ‘상명하복’ 문화가 강한 대표적인 기업인 현대 출신의 이명박, 군인 출신 독재자 아버지 밑에서 자연스럽게 권위주의를 체화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은 어쩌면 상당수의 일반시민들의 의식의 수준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양의 경우, 68혁명을 통해 ‘생활세계’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선생님이 학생에게 함부로 군림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내었고 남녀 간 관계가 더 평등해졌으며 동성애자, 소수민족(흑인, 유대인 등)과 같은 사회적 소수 그룹의 권리가 신장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68혁명으로 정권을 교체하지는 못했지만 일상의 큰 변화를 이루어냈기에, 사회혁명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 사회의 수직적 문화에 따른 폐해를 고칠 수 있는 길은 사회혁명에 있다. 문화는 정권교체 따위로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사상과 정책에서 큰 차이가 없는 보수양당체제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집권 세력이 누구인가보다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보통사람들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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