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예노동은 끝나야 한다

이 글은 ‘노예의 역사(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를 참고‧인용해 작성됐습니다.

  지난 해 인터넷을 달궜던 ‘신안군 염전 섬노예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대통령이 이를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로 묘사한 것처럼, 이 사건은 사람들 사이에서 현대판 노예 사건이라 불리며 뜨겁게 회자됐습니다. 2014년 1월 28일, 경찰은 전라남도 신안군의 한 염전에서 임금 체납과 감금으로 혹사당하던 장애인 2명을 구출했습니다. 피해자들은 하루 19시간의 고된 육체노동과 주인의 폭행에 견디지 못해 탈출하고자 했으나 감시로 인해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 2명은 각각 5년 2개월, 1년 6개월 동안 보수를 받지 못한 채로 강제로 일했습니다.
  연간 수만 톤의 천일염을 생산하고 있는 신안의 염전 업자들은 고질적인 인력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 무허가 인력소개소에서 일꾼들을 고용했습니다. 이렇게 한 번 염전에 들어선 노동자들은 주인의 강압적인 동원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한 노동자들이 무단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압력이 가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암암리에 묵인됐습니다. 허지용 전남장애인인권센터 소장은 “마을 주민들 사이에 일종의 카르텔이 존재해서 아무도 억압당하는 섬노예들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찰이 염전 근로자의 노동 실태를 조사한 결과, 임금 체불을 당한 염전 근로자 18명이 추가로 발견됐고, 10년간 1억 2천만 원의 임금을 받지 못한 근로자도 있었습니다. 과거 노예무역이 용인되던 시기에나 벌어질 법한 일들이 오늘날의 약자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중세 서양의 농노나 18세기에 성행했던 흑인노예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건만, 이들이 행했던 강제노동의 잔재는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새 암암리에 퍼져 있습니다.

  사실 이제껏 ‘노예’에 관한 역사 연구가 진행되는 것은 꽤나 드문 일이었고, 전통적으로 노예제의 부조리에 관심을 둔 사람은 보통 아주 소수의 석학뿐이었습니다. 노예제도는 유럽의 식민지 체제에서 요긴한 것이었고, 당시 기독교 교회는 이를 지지했습니다.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를 당연시하는 카르텔이 존재했고, 이는 당대의 저명한 사상가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됐습니다. 사회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들의 관심은 ‘원대한’ 역사, 즉 정치나 외교에 있었지 사회에서 억압과 소외에 시달리는 계층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노예는 시장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도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맨 처음에 노예가 된 자들은 누구였을까요? 고대 문명과 그리스‧로마를 거쳐오면서 일반적인 노예로 인식된 자들은 전쟁포로들이었습니다. 헤겔이 주창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은 노예의 존재를 정당화합니다. 헤겔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과 대립함으로써 스스로의 자유로움을 인식하려 하며 이 때 의식을 갖춘 또다른 존재인 타인을 만나게 되면 본인이 생명에 연연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자 사활을 건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싸움의 승자는 그로 인해 비로소 자유가 승인됐다고 여겨 무릎꿇은 패자를 노예로 삼게 됩니다. 헤겔은 이러한 방식으로 주인과 노예가 결정됨에 따라 역사에 노동이 생성됐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 주종관계가 성립되고 난 이후 이를 뿌리째 뽑기 위한 시도는 그 시작조차 어렵습니다. 주인은 노예의 생산을 소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노예가 없다면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없습니다. 이에 따라 노예는 없어서는 안 될 영속적인 존재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예는 한마디로 사회가 잘 기능하도록 조력하는 존재였습니다. 사실 노예제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영속돼 왔는데요, 노예제도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이유는 노예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이득을 봄에 따라 그러한 상태를 존속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발현됐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아메리카를 정복한 데 뒤이어 노예 무역은 전 유럽의 사업이 됐습니다. 유럽인은 아프리카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이들을 아메리카로 이주시킵니다. 노예무역은 비약적 증가를 너머 세계화됐고 심지어 프랑스는 「흑인법전」을 공포해 노예의 법적 자격을 정의하고 폭력행위를 법으로 승인합니다. ‘빛의 세기’라고 불리는 18세기 계몽시대조차 흑인노예무역은 횡행했고, 노예들은 벌거벗은 채로 엄격한 신체검사를 받은 뒤 묶음으로 팔렸습니다. 구매된 즉시 불에 달군 쇠로 낙인이 찍혔으며, 건강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행위만 용인됐습니다.

  노예제 존속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는 ‘무관심’에서 비롯됐습니다. 노예는 흑인이나 이슬람교도처럼 외국인 특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식민지 나라 출신에다 이교도였기에 노예로 팔려가는 나라의 국민들에게 심한 경멸을 받았습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유럽인이 흑인을 대할 때 발현하는 인종차별은 양심의 가책 없이 확립돼 있는, 일종의 사회적 분위기였습니다. 백인 기독교도의 계몽적 이성은 무의식적으로 자민족중심주의를 표방하면서, 흑인을 다른 사람과 동일한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북해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주권을 선포한 식민지 국가들의 모임이 노예제도폐지운동을 시작한 이래 노예제 폐지의 움직임이 서서히 확산됩니다. 미국의 경우 흑인 노예들이 목화 농사에 필수적인 인력이었기 때문에 찬반론자들의 입장이 서로 판이했고 결국 이는 북부와 남부 간의 지역 감정으로 이어져 남북전쟁이 일어나기에 이릅니다. 또한 개신교도들도 성서 해석에 차이를 둬 찬반파를 가름으로써 갈등을 빚습니다.
  1833년 영국 식민지 전체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는 법안이 가결된 이래 1838년에는 인도까지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됐습니다. 이후 프랑스‧에스파냐‧미국 등 전세계에 걸쳐 노예제의 소멸이 확실시됩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제가 19세기에 폐지됐고 따라서 오래전부터 현실적인 주제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머리에 언급한 염전 섬노예 사건과 같이,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노동과 자본을 착취당하는 현대판 노예들이 존재합니다.
  현재 노동을 착취하는 행위는 국제적인 규탄 대상이나, 이와 별개로 방글라데시‧파키스탄‧인도 등지에서는 여전히 극심한 아동노동 착취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빈민층 청소년들은 벽돌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도제수업을 받으면서 이 수업비를 갚기 위해 오랜 기간 무보수로 일하는 관행에 매여 있는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여러 투쟁에도 불구하고 기업계 또는 정치‧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맹목적으로 지지합니다.

  우리는 기나긴 노예의 역사를 통해,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모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들이 어떠한 행위를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건, 노예제가 널리 용인됐을 때 당대 사람들은 이를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이 노예 계급이 아니고 더군다나 노예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고 있는 입장이라면 노예제를 반대할 이유가 하등 없다고 생각했겠죠. 
  우리는 과거에 노예제가 횡행한 이유가 사회적 분위기, 무관심의 분위기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인권이 무시된 채로 자본과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현대판 노예’는 존재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회적 무관심의 흐름을 빌어 현대판 노예의 존재를 암암리에 묵인한다면 이는 노예제를 영속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될 수 있습니다. 과거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예제의 부당함을 인지하지 못한 채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 역시 ‘알지 못한다면’, 부당함에 인지하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식을 가지지 않은 채 묵인의 늪으로 빠질 가능성이 큰 것이죠. 몇백 년 뒤에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가 아닌 다른 연구자가 ‘노예의 역사’를 집필할 때 우리가 ‘현대판 노예’라고 말하는 그 노예가 범주에 포함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우리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부 관행에 분명하게 맞섬으로써 인류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울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행동해야 한다.‘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에 절대 타협은 없다. 절대 관용은 없다. 해결책은 단 하나, ’불관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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