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실존철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존재와 시간』을 내놓음으로써 ‘실존주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름도 비슷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존재와 시간』을 자신 나름대로 독해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새로운 존재론을 펼치려는 시도였다. 비슷한 것 같은 이들의 이론들은 교차점이 있는가하면 충돌되는 부분도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기묘한 상황에 도달하기도 했다(실제로 야스퍼스와 하이데거, 사르트르는 서로가 서로를 부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범위를 좁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특히 『존재와 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철학적’ 내용만을 바탕으로 한다. 다음 연재글에는 사르트르가 ‘실존적 정신분석’이라 칭하며 전개해나갔던 실존주의적 ‘심리학’을 다루어보겠다(철학적 설명을 짚고 넘어가야만 실존주의 심리학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이미 제시했던 ‘즉자’와 ‘대자’라는 두 항아래 전개된다(물론 헤겔이 의미했던 바와는 다르다). ‘즉자(卽自)’는 그 자체로 ‘존재’로 충만한, 어떤 변경도 가해질 수 없는 사물(결코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이다. 그런데 이러한 즉자에, 이 우연(偶然)으로 덩어리진 것에 존재론적인 감압(減壓)이 ‘우연’히 일어난다. 그 속에 ‘대자(對自)’가 발융(發融)한다. 여기서 대자는 간략히 말하면 바로 우리 자신인 ‘인간’이다(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Dasein)’와 동등한 의미다). 세계에 엄존하는 즉자, 그리고 그 즉자로부터 우연한 존재론적인 작용에 의해 우연하게 등장하는 대자―그러나 즉자에 종속당하는 듯이 보이는 대자는 대자에 의해서만 자신의 모습을 세계에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즉자의 한계에 의해 대자와 즉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사물들의 상태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대자의 무화하는 역량에 의해서일 뿐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비로소 우리를 ‘자유’의 영역에 데려다 줄 단서이다(‘무화’에 관해 축약해 설명하면, 즉자를 드러내게 해주는 대자의 일종의 존재론적인 작용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런 대자의 존재방식은 ‘행동’이다. 대자가 의도하지 않든 의도하든 간에 그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즉자-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이르러 ‘대자-인간은 행동한다’라고 명명한다. 행동은 즉자-세계에 어떤 형태로든 작용을 가한다. 인간은 삶의 방식 자체가 ‘행동’이기 때문에 아무런 행위를 하고 있지않다하더라도 그조차도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대자의 삶의 방식 자체가 ‘행동’에 의한 것이라 정의하고, 행동의 첫 번째 조건은 ‘자유’라는 언명을 한다. 인간이 자유롭다니, 이미 지겹게 들은 이야기가 아닌가? 보통 자유는 의지와 결부되어 ‘자유의지’라는 개념, 즉 내가 어떠한 목적을 설정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곳에 도달한다는 의미 혹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억압의 부재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혹은 ‘성취해야 될’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과 다름 아닌 것으로 설명된다(그렇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자유와 의지라는 개념을 분리해서 생각해야한다는 논의를 따로 할당하여 논증해가기도 한다. 인간은 애초에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가 먼저오고, 의지는 그 다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중지할 자유가 없다’,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등의 언급은 대자존재인 인간 자신을 ‘자유’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 느끼기 위해서 앞서 언급된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정의했던 ‘자유’의 개념을 끌어다보자. 하이데거의 ‘자유’는 죽음 혹은 인간을 위협하는 어떤 상황을 극복하는데서 오는 ‘성취되어야’하는 무언가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를 거부한다. ‘자유’는 무슨 결단이니 노력을 통해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대자존재인 인간은 애초부터 자유로운 존재다.
철학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은 ‘자유로워야만 한다’는 주장을 힘겹게 펼쳐온 것을 미묘하게 비틀어,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라고 일거에 바꾸어버린 사르트르의 외침은 우리에게 축복으로 다가오는가? 자유에 대한 논의를 계속 진행해가는 사르트르의 웅변에 마침내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었다는 환희의 목소리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인간을 ‘책임지는 존재’로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행동한 모든 것은 스스로의 책임을 져야한다(이 부분이 다음 연재글에서 설명할,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거부하고 의식의 일원성을 주장한 사르트르의 주장의 핵심이다. 여기서 짧게 언급하자면,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자신에게 불리한 행동을 무의식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신경증환자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행동 메커니즘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는 모순된 상황 때문에 논파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동시에 ‘책임’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고 반대로 인간은 책임지기 때문에 ‘자유’라는 짐을 얻게 되었다. 사르트르의 자유는 자유만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유-책임’이라는 풀리지 않는 얽힘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저주로 다가오는가? 인간이 자유롭다는 사실에 대해 기뻐하지도 않는 (오히려 ‘책임’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인간과 결부시킨) 사르트르는 그렇다고 이 상황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책임져야할 것, 그것은 일종의 즉자와 결부되어 대자에게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앞서 대자는 즉자에게 존재론적인 작용을 가한다고 했다. 대자인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어찌할 수 없이 내맡겨만 진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책임은 인간을 억압하는 굴레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능성’을 부여하는 문으로 바뀐다. 새로운 상황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여기서 바로 그 유명한 ‘상황 속의 인간’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의 상황에 처해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부모님을 둔 나는 내가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태어나보니 부모님이 대한민국에서 나를 낳으신 것이다. 이것은 ‘상황’, 즉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종의 세계를 뜻한다. 이 나라에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변경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미묘한 가능성이 ‘상황’을 비집고 대자에게 다가온다, 아니, 그 가능성을 향해 대자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 채 다가간다. 변경할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이 우리와 엉켜있지만 반대로 이 사실들 간의 관계를 나의 ‘자유’로 새로운 의미연결을 통해 ‘새로운 상황’을 창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부모님의 아들인 나는 그저 그렇게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자유’로 한국교원대학교 물리교육과에 재학 중이며 임용고사를 앞두고 있으며 소심하고 염세적인 성격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른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다닐 수도 있었으며 당당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주어진 목표,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과 이루고 싶었던 사랑, 좋은 학업성적을 성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나의 자유-선택으로 지금 이러한 모습으로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매순간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들을 하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상황, 새로운 나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대자-인간의 존재방식을 ‘행동’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행동의 조건은 ‘자유’라고 못박아둔다. 하지만 그의 자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자유와는 전혀 궤를 달리한다. 그에게 ‘자유’란 낭만적인 문학적 수사는 더더욱 아니며 앞선 철학자들이 논의한 경로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전의 관점들이 자유를 인간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부속물’, 혹은 ‘성취의 대상’으로 여겼다면, 사르트르는 인간 스스로가 ‘자유 그 자체’라고 정의함으로써 동시에 ‘책임지는 인간’이라는 문제를 끌어들여왔다. 자유-책임이라는 풀 수 없는 인간의 존재근본조건은 축복도, 저주도 아닌 그저 인간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는 사르트르의 대담한 그러나 매우 공정한 태도 속에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 철학’이라는 실존주의는 막무가내인 방종도, 딜레탕트적인 것도 아닌 어떤 사조보다 ‘진지한’ 철학인 것이다.
이제야 우리는 자유를 주제로 한 심리학을 다루기 위한 무기를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인간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사르트르는 정신분석학을 어떠한 이유로 비판했는지 살펴볼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 기자명 김용원(물리교육09)
- 입력 2015.04.28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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