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영국의 시인 T.S.엘리엇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유명한 싯구를 남겼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4월이 오면 4·19혁명을 기억하며 이 말을 읊조렸지만, 사실 그것은 4·19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레토릭이었다. 그런데 작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난 뒤에는 정말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을 절감했다. 특히 기울어진 선체 안에서 죽음을 예감하면서 아이들이 남겼던 동영상을 볼 때는 이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희생시킨 우리 사회가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1년이 흐른 뒤 다시 찾아온 4월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 잔인함을 내뿜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절망하는 유가족들에게 퍼부어지는 푸념, 조롱, 비난, 폭력이다.
  혹자는 말한다, 유가족들의 외침이 ‘무리한 요구’라고. 그러나 지금까지 유가족들이 정부에 요구해온 것은 단 하나이다. 왜 세월호가 침몰했고, 왜 신속하게 구조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는지,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식들이 왜 죽었는지를 명확하게 밝혀달라는 것이다. 이는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구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 즉 인지상정이다. 우리는 피해자의 아픔과 절규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갖추어야 한다.
  혹자는 말한다, 유가족들의 몸부림이 ‘대통령을 겨냥한 반정부 투쟁’이라고. 그러나 처음에 유가족들은 인명구조에 무능한 정부를 원망하면서도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참사 다음날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을 찾아갔을 때 일부 유가족들은 대통령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빌며 “우리 아이를 살려주세요”라고 애원했다. 또한 대통령 자신이 유가족들에게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엄벌’을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상황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이제 지겨우니 그만하자’고.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우연한 사고이거나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이 초래한 구조적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일’이다. 따라서 철저한 진상규명 요구는 참사의 원인을 밝힘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는 ‘가만히 있으라’거나 ‘잊어버리라’는 명령에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대면하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모든 비극적 사건들은 처음부터 그 진상이 드러난 적이 없었다. 부당한 권력은 항상 진실을 가리고 국민의 기억을 통제하고자 한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지금은 교과서에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기록되는 1980년의 ‘5·18’은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철저하게 은폐되었다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자들의 끝없는 희생과 87년 민주항쟁의 결실로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것은 그저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기억통제에 맞서 진실에 다가가려는 실천적 의지와 성찰적 지성을 필요로 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라는 근본악은 특정 권력자의 악한 의지 때문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사유하지 않음’과 ‘정치적 행위능력의 상실’에 의해 야기된다고 갈파하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서 민낯을 드러낸 자본의 무한정한 탐욕과 사건의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국가의 무책임과 비정함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는 한 때 예외적으로 발생했던 불행한 사건 정도로 기억될 뿐 그러한 비극을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모순은 그대로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사유하지 않음’으로 인해 ‘악의 평범성’을 반복하는 꼴이 될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을 향한 실천과 성찰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복잡하게 전개되는 사건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친구와 가족 등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유가족과 생존자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공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실천의 출발이다. 지난번에 우리 학생들이 잔디광장에 홀로선 나무에다 노란 리본을 달아놓은 것도 아주 감동적이었다. 만약 더 의지가 있다면 안산의 4·16기억저장소, 단원고등학교, 합동분향소와 하늘공원을 방문하면 될 테다. 이 모든 것이 부담스럽다면 누가 말했듯이 벽을 보고 크게 소리라도 쳐보면 된다.
  세월호 참사를 성찰하는 것은 사건 자체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인 동시에 그 사건에 ‘나’를 기입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다수의 희생자가 학생과 교사였기 때문에 교사를 꿈꾸는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내가 교사가 되었을 때 이러한 사건이 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보자.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이 나올 때 그것을 믿고 학생들을 진정시켜야 할까, 아니면 나 자신과 학생들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야 할까? 학생들이 선체에 갇혔을 때 나는 죽음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달려갈 수 있을까? 아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이 사회의 모순에 눈을 감고, 진실을 밝혀달라는 유가족들의 절규에 귀를 막고, 그저 묵묵하게 지식전달자의 역할에 전념하는 것이 내가 꿈꾸는 교사상일까?
  이 따뜻한 봄날에 왜 이렇게 무거운 글을 써야하는지 나 자신도 원망스럽다. 55년 전의 4월이 ‘피의 화요일’에서 ‘4·19혁명’으로 전변되었듯이, 작년의 잔인했던 4월이 빨리 따뜻한 4월로 꽃피우기를 갈망한다.

저작권자 © 한국교원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