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 2014. 12. 1.
길가의 풀꽃에게도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리라. 먼 곳까지 향기를 날리지는 못해도 소박한 잎새 하나, 꽃잎 하나 틔워 놓고는 흐뭇한 미소 짓는 것이 그들의 삶이니.
1. 꽃은 그렇게 또 피고 지네
순환(循環), 꽃이 피고 또 지듯 인간은 태어나고 또 죽음을 맞이한다. 지는 것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자연 속에 묻히고, 새 생명은 움을 틔운다. 삶이란 으레 그렇게 돌고 돌아가는 것. 오늘이 오고 또 그 다음 날이 오면, 하루는 구름처럼 흘러간다. 그렇게 모든 것은 조금씩 바뀌어간다. 변해가는 것들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일부가 된다. 억울함에 흘렸던 눈물도, 짠지 같은 땀방울도, 백일몽 같던 사랑도 다 하나의 조각이 되어 삶 속에 자리 잡는다.
2. 어디에서나 꽃은 핀다
외로운 골짜기에도 볕은 찾아오고, 산비탈 판자때기 집에도 달빛은 다정하다. 알아주는 사람 없는 이, 추운 데서 입김 불며 자는 이, 시련에 흔들려 울부짖는 이에게도 삶이란 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궁 속에서도 꽃이 피어난다. 남들이 보잘 것 없다고 하든 말든, 노란 꽃잎을 정성스레 닦으면서 그렇게 꽃은 피어난다. 밟히지 않으려 조심스레, 맘 졸이면서도 아름답게 피어난 그 꽃. 냄새나는 시궁이라 욕해도 꽃은 빙그레 미소만 짓는다. 마음이 고와 그리 예쁘게 피었는가, 햇살이 들어와 물어본다. 드디어 어둠 밖으로 목을 내민 어린 꽃들을 향해 바람도 손을 흔든다. 괴롭냐 물으면 꽃들은 대답도 않고 가만히 고개만 젓는다.
훅훅 찌는 더위에 어깨를 부대끼며 그들은 살아간다. 좁고 어둑한 땅, 꾸역꾸역 뿌리를 내리면서 꽃잎이 눈을 뜬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삶. 서로가 기댈 어깨를 내어주니 더워도 머리 붙이고 살아가겠지. 가끔은 눈을 감고 포실한 흰머리가 될 때를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머리카락마저 모두 날려버리고 사랑하는 땅에 잘 앉을 수 있기를 기도할 때, 민들레는 다음 해를 준비할 것이다.
어디에서나 꽃은 핀다.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다. 키 작은 꽃이면 어떻고, 이파리 적은 꽃이면 또 어떠랴.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이 땅은 아름답고 그들의 존재로 이 세상 바닥이 잠기도록 아름다워지는 것을. 이 땅 어느 곳에서나 삶은 이렇게 피어난다. 그 하나하나가 눈부시지 않은 삶이 없으니, 세상은 이처럼 밝게 빛난다.
3.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후략)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꽃이 피기 위해서는 바람이 불어야 한다. 뜨거운 해도 있어야 하고 타는 듯한 목마름도 있어야 한다. 어떤 날은 흠뻑 젖은 채로 찬 눈보라를 맞고 서있을 때도 있고, 성장통처럼 찌릿한 아픔을 견뎌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시련들을 겪은 꽃은 한 뼘 더 자라난다. 힘들고 아팠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더 굳세어진다.
밤하늘이 검을수록 별이 더 빛나듯, 삶의 슬픔이 깊을수록 행복의 가치도 커진다. 꽃이 삶 속에서 겪는 시련들은 앞으로의 순간을 더 아름답게 하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장마에는 모르던 단비의 소중함을 가뭄으로 느끼고, 한여름에는 몰랐던 따듯한 햇살도 손 시린 겨울밤엔 알게 된다. 시련은 이렇게 때때로 선물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선물을 통해 우리의 삶은 각자의 꽃을 피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흔들리지 않고 가는 인생도 없다. 작은 바람결 하나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여린 풀꽃 같은 인생이라, 태풍 같은 세상사 견디기 힘들어 우리는 얼마나 울었던가!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냐 물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애꿎은 비는 계속 내리고 추운 발만 더 얼어붙는 고통 속, 의지 있는 이는 길을 찾았고 외로운 시간을 이겨낸 자만이 새 길을 열었다.
4. 이 꽃, 저 꽃 모두 어여쁘니 꽃놀이 가자
그 자태는 달라도 꽃은 모조리 꽃이니, 모란마냥 커드란 꽃잎 가진 꽃도 있는가하면 밥풀때기처럼 얄궃고 작은 꽃잎을 가진 꽃도 있다. 향기가 널리 퍼져 멀리서도 벌 나비 찾아드는 꽃이 있고, 향기는 보잘 것 없으나 얼굴에 맑고 깨끗한 정을 지닌 꽃도 있다. 어떤 인생을 살든, 어떤 사람이든, 그의 인생은 한 송이의 꽃이며 그 꽃 속에 아름다운 이름이 있고 세월이 있다.
서릿발 날리는 어느 날, 떨어진 꽃잎 사이로 누렇게 마르는 잎들이 있다. 바스락,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작은 몸으로 땅에 눕는다. ‘아직 덜 한 것 같은데, 덜 정리한 것 같은데’ 아쉬움 때문에 쉽게 눕지 못하고 손만 부르르 떤다. 아직도 마음속엔 태어날 때 생생했던 햇살과 바람이 느껴지는데, 움직일 수 없는 몸이 야속해서 꽃은 운다. 이슬 같은 눈물 속에 사랑했던 날들을 그린다. 그러다가 ‘가자, 꽃놀이 가자.’하고는 눈밭에 스러진다.
그렇게 꽃은 지고 또 다시 봄이 찾아온다. 눈 녹은 땅에, 꽃들이 떠난 자리에 새잎이 돋고 다시 양기가 든다. 꽃놀이 간 꽃들도 지켜보겠지. 이 땅에 또 다시 이렇게 아름다운 꽃들이 채워지고, 바람이 불고 햇살이 드는 것을. 꽃이나 우리나 어여쁜 모습 똑같으니, 한바탕 꽃놀이 하러 떠난 이들은 다시 오지 못해도 이곳은 언제나 꽃향기로 가득할 것이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자연의 순환일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