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14. 10. 20.
지난 6월 4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이른바 ‘진보교육감’이 대거 당선된 결과를 놓고, 교육계의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와, 교육부와 갈등이나 급진적 개혁으로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함께 하였다. 이러한 상반된 예상은 실제로 ‘9시 등교’부터 현실화되었다. 일부 교육청은 학생들의 수면권이라는 기본권과 건강을 지키는데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9시 등교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보수 교육단체나 사회 일부에서는 이에 반대한다. 학교가 끝난 후 학원에 갈 시간이 빠듯하다거나, 맞벌이 부부의 경우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한 채 출근을 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이다. 9시 등교 정책은 오히려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할 것이라는 그럴듯한 논리를 곁들인다.
여기에서 어느 편의 주장이 맞는지를 따져보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논란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한’ 현상이 있다. 등교를 하는 주체는 학생들인데, 정작 사회적 논의에서 학생은 보이지 않는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의 목소리는 언론에 별로 실리지 않는다. 물론 9시 등교가 학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논의의 주된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런 논의도 ‘어른’이 보는 영향이다. 8시에 등교를 할 것인가 9시에 등교를 할 것인가는 그저 어른이 학생들에게 주는 것이고, 그 영향이 어떠할 지도 어른이 예상하는 영향이다.
학교교육과 관련된 중요한 의사결정에 학생이 빠져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론 초․중․고등학교에는 학생들의 대표기관인 학생회가 존재한다. 학생들은 학생회장을 직접 뽑고, 학생회는 학생들의 의사를 모아서 학교에 전달한다. 그렇지만 전달할 수 있는 의사결정의 주제는 제한적이고, 그나마도 전달할 뿐이다. 1995년 각 급 학교에는 학교의 자율성을 높이고 중요한 문제를 자문․심의하는 기구로 학교운영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학교 사회의 민주적 의사결정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학교 운영위원으로는 학부모, 교원, 지역인사가 참여한다. 그렇지만 학생의 참여는 본격적으로 논의도 되지 않았다. 진보적 교원단체라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나 학부모 단체인 참교육 학부모회, 평등교육학부모회 등도 학생의 참여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학생들은 아직까지 더 배워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라면서 이를 당연시한다. 학운위에서 심의하는 사항에는, 학생 문제뿐 아니라 학교장이나 교사와 같이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문제도 들어있으며, 심지어 예․결산과 같은 ‘돈’의 문제도 포함되므로, 미성년자인 학생들이 학운위에 참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식의 구분이 설득력을 얻을 만큼 ‘어른’은 합리적이고, 학생은 비합리적일까? ‘여덟살 어린이가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책이 있다. 이상적인 대통령이 가져야 할 조건을 컴퓨터에 입력에 놓고 대통령을 뽑으라고 하니까, 컴퓨터는 여덟 살 아이를 선택했다. 어린이 대통령이 제일 먼저 시행하려는 정책은 의회 활동의 생중계와, 군대를 없애는 것이다. 어른의 세계에서 이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논쟁거리이겠지만, 어린이 대통령에게는 간식 시간을 지키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복잡한 이유를 들이대는 어른의 의사결정은, 약속의 준수라는 단순한 어린이의 의사결정보다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
사회에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해지면서 사회참여도 활발해졌지만, 참여의 방식은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근래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나 이념뿐 아니라 세대와 지역 등 다양한 요인으로 갈등이 보편화되고 있다. 갈등의 과정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설마 사회가 깨지는 결과까지 오지는 않겠지만, 이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위기감을 느끼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갈등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회구성원을 비판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갈등의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들은 그야말로 졸렬하다. 한편에서 ‘전라도 홍어’라고 하면, 다른 한편은 ‘고담 대구’라고 받는다. ‘좌빨’과 ‘수꼴’ 정도는 진부한 느낌마저 준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야 인간의 본성이겠지만, 이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이익을 두고 보지 못한다. 자기의 권리를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없애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회구성원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고, 오직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데서 만족감을 느낀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정치, 사회적 목적으로 사회 일부 세력이 조장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그렇지만 여기에 사회구성원들이 ‘호응’하는 것은 합리적 사회참여의 방식이 내면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탓이다.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은 ‘참여’이다. 민주시민의 핵심 자질은 사회의 의사결정에 합리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세와 능력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민주시민의 자질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여 민주주의의 훈련은 학교 교육이 해야 할 핵심 기능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급회를 넘어서, 학생회를 넘어서 학생들이 몸담고 있는 학교라는 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학운위에 학생이 참여한다는 생각 정도는 기본적으로 당연시되어야 한다. 교사를 꿈꾸는 사람들은 과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학교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을까? 이는 어쩌면 교사를 양성하는 한국교원대학교 학생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가장 본질적인 질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