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 2014. 11. 17.

  사람들은 망각을 극복하기 위해 글을 쓴다. 특히나 작가들은 떠오른 영감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또 사람들로부터 망각되지 않기 위해 저마다의 작품을 남긴다. 사르트르의 저서 <구토>는 주인공인 앙투안 로캉탱이 앞으로 서술해 보일 일기의 첫머리로 시작해, 그 자신의 고찰에 대한 마무리로써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밝히며 끝을 맺는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철학적인 사상과 의견을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한다. ‘나는 늘 마음을 가다듬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인상은 또 나에게서 빠져나갈 것이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다.

  처음에 로캉탱이 구토를 느끼게 된 계기는 바닷가의 돌 하나를 집어든 것이다. 단지 주변에 있는 아이들처럼 물수제비뜨기를 하기 위해 집어들었을 뿐인데 왜 거기서 역겨운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일까? 주목할 수 있는 점은 돌을 집어들기 전의 마음 상태와 돌을 집어든 후의 마음 상태 중간에 ‘어떤’ 상태가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는 일종의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주제는 바로 ‘왜 돌이 로캉탱의 역겨움을 유발하였을까?’ 란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후 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는 여러 사물로부터 돌을 집었을 때와 유사한 역겨움을 느낀다.
  여기서 잠깐 로캉탱의 구토증을 잠시나마 가라앉게 해 주었던 음악에 주목해 보자. 그는 필연성의 의미를 강렬하게 주장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준비된 각 음들이 한 곡을 이뤄 내고 이로 인해 개별적 주체인 각 음 자체는 죽어버린 상황. 이를 필연적인 현상으로 여기는 로캉탱의 견해는 자신 역시 ‘이 세상’이라는 한 곡을 위해 필연적으로 태어난, ‘음’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내재돼 있음을 보여준다.
  계속해서 원인을 탐색해 나가는 와중 구토는 모든 사물로 확장된다. ‘세계는 자신의 위기를, 그 ‘구토’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약화된 사물의 한복판’에서 뛰쳐나오는 로캉탱은 이제 정말 의지할 곳이 없다. 어딜 가든 구토 투성이인 것이다. 그 순간 로캉탱은 ‘나는 존재할 권리가 없었다. 나는 우연히 생겨나서 돌처럼, 식물처럼, 세균처럼 존재하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에 대한 우연성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토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시작된 사색이 어째서 우연성을 인정하는 태도로 귀결된 것일까? 이 대목에서 로캉탱이 찾으려는 구토의 원인이 돌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만약 구토가 돌에서 비롯되었다면 어째서 멜빵이며 달걀을 보고도 구토를 느낀단 말인가. 결국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구토 유발 인자는 로캉탱 스스로에게 내재된 어떤 인식이었던 것이다.
  로캉탱 자신인 ‘나’는 존재하고 싶지 않아도 존재한다. 존재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결국 나의 생각이며 그런 생각을 함으로써 또다시 나는 존재한다. 결국 내가 생각하기를 단념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로캉탱이 이를 깨달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로캉탱은 그저 ‘존재’이며, 이번 계기로 인해 존재를 깨달은 존재가 되었을 따름이다.
  로캉탱은 독학자와 대화를 하던 와중 좀더 명확한 구토를 느끼고 구토의 원인도 간파한다. ‘나는 그 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에 다른 ‘구토’가 생겼다.‘ ‘나’의 존재를 깨닫고 나자 이제서야 돌의 ‘존재’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온 사물의 존재에 둘러싸인 로캉탱은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껴 공원으로 피하고, 그 곳에 자리한 마로니에 나무를 통해 구토가 병이나 발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이해한다. 여러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구토를 느낀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의 구토를 깨닫게 해 준 계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공원에서 발견한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는 사실상 뿌리라는 ‘본질’이 없어도 ‘존재’한다. ‘뿌리’라는 어휘에 대한 의의며 기호가 없어도 그건 ‘존재’한다. 로캉탱도 마찬가지다. 그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그의 탄생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것들 심지어 ‘로캉탱’ 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본질이 없어도 그냥 로캉탱 스스로인 ‘나’가 ‘존재’한다.
  돌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물수제비뜨기를 하기 위한 도구로의 돌이 아니다. 돌이라는 본질적인 어휘 없이도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비로소 로캉탱이 <실존(존재)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본질을 따져보지 않아도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에 로캉탱이라는 인물도, 물수제비뜨기를 하기 위한 돌도 모두 공연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럼 왜 로캉탱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깨달음에 대해 구토를 느꼈을까? 여러 가능성이 있다. 일단 첫째로 죽으나 사나 자신은 공연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후의 허망함 때문일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로캉탱은 필연성에 상당한 애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필연성을 찾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공연한 존재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더 충격이 컸을 것이다.
  두 번째로, 각 사물의 존재에 대한 부조리를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 로캉탱은 나무 뿌리의 실존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어찌 됐든 존재한다. 설명할 수 없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부조리가 그의 속을 뒤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캉탱 자신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정작 그 자아가 무엇인지 알 순 없는 부조리에 대한 답답함이 그의 마음을 채운 게 아닐까.
  세 번째로, 로캉탱이 사회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때 돌은 그 역겨움의 원인을 알게 하는 첫 조력자이다. ‘구토이다. 그것이 그 더러운 자식들ㅡ‘코토 베르’나 다른 곳의 그 더러운 자식들ㅡ이 그들의 권리를 휘둘러 숨겨 보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로캉탱은 ‘우리 모두 공연한 존재이며 무상한 사물들이다. 다 똑같이 공연하다.’ 라는 사실을 안다. 이에 로캉탱은 ‘더러운 자식들’ 이 그들과 똑같이 공연한 존재에게 고통을 가했다는 사실에 깊은 분노를 느꼈을 수 있다.

  ‘본질적인 것, 그것은 우연이다. 본디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뿐이다.‘

  사르트르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공연한 존재로 우연히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더 특권을 가지거나, 다른 인간을 괴롭게 한다는 사실이 부조리한 것이다. 전쟁이나 종교로 인한 분쟁도 결코 합리화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존재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와 다른 사람의 본질에 대한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A는 반드시 A의 본질을 가질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지 우연이었으며 A가 B의 본질을 가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B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힘으로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지금 알 수 있고 알 필요가 있는 것은 ‘실존’하는 인간인 나 자신이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로써 실존은 행동하는 주체적 존재를 탄생시킨다. 그렇게 보면 구토는 로캉탱에게 긍정의 모티브를 암시한 게 아닐까? 구토를 통해 로캉탱은 자신의 삶 그리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새로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로캉탱은 이제 주체적으로 새로운 본질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의식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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