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채널 ‘피지컬갤러리’의 프로그램 ‘가짜사나이’가 인기를 끎에 따라 출연자들이 무차별 저격과 악플에 시달렸다.
지난 10월 15일 정배우(유튜버·28)는 "로건 사건에 대한 토론 대깨근, 대깨건 다 겨들어오세요 전화토론"이라는 제목의 생방송을 진행했다. 해당 방송에선 가짜사나이 1편에 교관으로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로건(본명 김준영·35)의 나체 사진이 공개되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결국 그의 아내는 스트레스로 인한 유산을 겪었다. 사람이 죽었다. 이제 사람들은 정배우에게 책임을 묻는다.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사생활을 침해했고 결국 한 생명을 죽였다며. 물론 그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필자는 묻고 싶다. 그가 쥐었던 칼은 누가 준 것인지.
2008년 10월 2일,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최진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내가 8살 때의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난다. 연일 뉴스에선 그녀의 비보를 전했다. 악플의 개념조차 흐릿했던 시절이었다. 이 안타까운 죽음을 겪고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동안의 무지와 과오를 반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은 악성 루머와 악플 생산을 멈추지 않았고 황색 언론은 확산에 동조했다. 그에 따른 결과로 또 여러 안타까운 생명의 불꽃이 꺼졌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설리(본명 최진리), 구하라가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 불과 2019년, 작년이다.
사건이 일어나고 다시 사람들은 그동안의 무지와 과오를 반성했다. 그리고 2020년,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죽었다. 일이 이러하니 그동안 해온 반성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반성이 있기는 한 것일까? 반성은 없었다. 있었다면 또 다른 살인은 없었겠지.
생각건대 키보드로 저지른 살인보다 비열한 일은 없다. 우리는 불의를 보고 분노한다. 아동에게 가해지는 폭력, 권력을 이용한 수탈과 같이 명백히 불의한 것을 보면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노를 실천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거의 없다. 대다수의 소시민은 그저 불의를 참는다. 그러나 키보드를 잡으면 달라진다. 분노하는 것이 마땅한 불의인지, 그들은 판단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노에 뒤따를 타인의 아픔은 무시한 채, 사정없이 분노한다. 그들의 분노에는 목적이 없다. 그저 분노 그 자체가 목적이다. 책임도, 목적도 없이 그들은 불의를 참지 않았다는 것에서 오는 성취감에 중독되고, 중독된 사람들은 다시 분노할 불의를 찾는다. 그러다 마땅한 장작이 없으면 직접 땔감을 만든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성취감을 얻는데 필요한 분노할 요소가 사라지면 이들은 억지로 땔감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허위인지, 사생활 침해인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유튜브가 활성화됨에 따라 정배우를 비롯한 ‘이슈 유튜버’가 나타났다. 이들이 올리는 영상 대부분은 ‘저격’이다. 유명인의 치부, 약점 등을 파헤쳐 공개하는 것이다. 즉, 전문 나무꾼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충분한 수요를 위해 사정없이 무고한 나무들에게 도끼를 휘두른다. 그 도끼에 잘리는 나무들의 비명에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견디지 못한 나무의 죽음만이 벌목을 잠시 멈춘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다른 나무가 꺾인다. 도끼를 쥐어준 이는 정배우와 같은 나무꾼에게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에, 또 다른 이에게 도끼를 건넬 것이기 때문이다.
칼보다 펜으로 이뤄지는 살인이 더 잔인하다. 물리적으로 상처 입은 육신은 언젠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만 펜이 입힌 상처는 흙이 되어도 꿋꿋이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보다 키보드가 더 비열하다. 알량한 정의감만을 취하고 책임은 화면 속 다른 이에게 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 없는 반성만 반복된다.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이, 더 큰 반성이 있어야 이 연쇄살인을 멈출 수 있을까. 이제는 참된 반성이 필요하다. 지금 나는 분노를 위해 분노하는 것은 아닌지 차분히 반성하자. 진짜 분노해야 할 대상은 유명인의 치부가 아니라, 그동안 키보드가 벌인 비열한 연쇄살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