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 무표정한 얼굴이 귀여우면서도 조금 서글픈 느낌의 이 소년은, 그림책 ‘지각대장 존’의 주인공이다. 존은 매일 아침 학교에 간다. 하지만 존의 여정은 순탄치 않다. 하루는 하수구에서 악어가 불쑥 나타나 책가방을 문다. 존은 할 수 없이 장갑 하나를 던지고 허겁지겁 학교로 달려간다. 학교에 늦은 존은 선생님께 사자를 만났다고 설명하지만, 선생님은 존의 말을 믿지 않는다. 펄쩍 뛰며 300번의 반성문을 쓰게 한다. 다음 날 존은 덤불에서 사자를 만나 학교에 늦고, 그 다음 날에는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학교에 늦는다. ‘지각대장’이 되어버린 존은 매일 매일 늦은 이유를 설명하지만, 선생님은 존의 말을 알아채지 못한다. 300, 400, 500개의 반성문이 수두룩히 쌓여간다. 존은 장갑을 빼앗기고, 바지에 구멍이 나고, 파도에 흠뻑 젖으며, 뒤늦게 학교에 온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세균 보호 필름이 붙어 있었다. 처음엔 매끄럽던 필름에서 점점 버튼이 드러나는 느낌이 들어, “필름이 너무 오래됐구나. 빨리 교체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또 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좀 아래쪽을 눌렀는데, 우둘투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차. 점자였다. 필름이 매끄러웠던 시기 시각장애인이 마주한 세계는 어땠을지, 나는 필름이 닳고서야 생각해보았다.
하루는 인터넷 기사를 보는데, 입이 보이는 마스크를 착용한 한 연예인의 사진이 스쳐갔다. 방송을 더 재밌게 하려고 그런 건가? 무심코 넘어갔다. 그런데 며칠 후 내 낮짝은 뜨거워졌다. 이 마스크는 시청자들의 웃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청각장애인들의 소통을 위한 ‘립뷰 마스크’였던 것이다. 손동작뿐만 아니라 입모양, 눈썹, 안면근육, 미세한 살의 떨림, 그 모든 것으로 언어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꽉 닫힌 마스크는 폭력이었다. 소통은 목소리로만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먼저 생각하지 못하고 ‘재미’부터 떠올린 내 무지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사회도 다르지 않았다. 립뷰 마스크는 청각장애 학생들의 언어재활 치료를 하는 대전 ‘하늘샘치료교육센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왜 그곳이 시작이어야 했을까. 왜 애초에 두 마스크는 나란히 마트 진열대에 놓이지 못했을까. 왜 이제서야 ‘신제품’이 되고, 왜 청각장애인들은 ‘숨통이 트여야’ 했을까. 코로나19가 지겨울 지경이 되어서야, 사회는 장애인의 재난을 인지했다.
영화감독 이길보라는 청각장애인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자신의 모어는 수어라고 말하는 그는 한참 성장하기도 전에 통역사가 되어야 했다. 침묵과 소리를 이어야 했고, 주변의 시선에 먼저 설명해야 했다. “청각장애인이라고 인지한 순간, 불쌍하고 안타깝게 쳐다보는 시선이나 감정이 늘 어려워요. ‘불쌍하지 않아요. 그들만의 세계가 있어요’라고 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6월 29일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 이길보라는 차별금지법이 ‘이유’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차별적 시선에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온갖 정보에서 소외됐던 부모님의 정보접근권을 마련하라고 화낼 수 있는 이유, 상처받지 않을 이유...” 또한 그는 차별금지법이 ‘차별 해소를 매번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로 가는 ‘기본값’이 되기를 바란다. “당연히 약자로 불리는 이들을 위한 시스템이 기본값이 돼야 하지 않나요. 왜 맨날 싸워야 하나요. 부모님이 ‘코로나에 걸리면 어떡하지, 누가 자가격리를 설명해주지’ 이런 걱정을 할 때마다 아찔해요.”
그의 질문에 사회는 답하지 못한다. 그가 설명하기 전에, 시선을 먼저 반성하지 않았다. 장애인이 부당한 시스템에 부딪히고 아파하기 전에, 사회는 모두를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한 권리를 보장해주지도 않았다. 장애인이 먼저 요구해야 했고, 당연한 요구를 하면서 이유를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이유를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설명하고, 싸우고 있다.
다시 존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느날, 존은 제 시간에 학교를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선생님이 고릴라한테 붙잡혀 있었다. 선생님은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존의 대답은 명료했다. “이 동네 천장에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 따위는 살지 않아요, 선생님.” 이 책의 제목은 ‘지각대장 존’이지만, 지각을 한 사람은 존이 아닌 선생님이다. 바지가 뜯기고, 물에 흠뻑 젖은 존이 끊임없이 설명할 때,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300번, 400번, 500번의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이 돌아오는 답이었다. 사회도 다르지 않다. 사회는 장애인의 목소리를 배제하며, 늦고 또 늦고 있다. 그렇게 지각대장이 되어가는 사이, 허술한 사회적 안전망과 편견은 장애인을 물어 뜯고, 덮치고 있다. 현실 속 존이 학교에 오지 못하기 전에 사회는 존의 목소리를 알아차려야 한다. 반성문으로 용서되지 않는다. 동화 속 선생님은 다행히 고릴라를 만났다. 뒤늦게 존의 신호를 이해하고, 부끄러운 얼굴로 존과 마주하여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고릴라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전히 수많은 존들의 외침만 남아있을 뿐이다. 최근 변화하는 사회는 존의 외침에 귀기울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존의 외침이 크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아직 사회는 고릴라의 손톱밖에 보지 못했다. 거대한 고릴라를 마주하기 전에, 존의 반성문이 더 쌓여가기 전에, 사회는 지각을 멈추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