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어서는 안 된다’
윤동주의 시 ‘병원’의 한 구절이다. 문학은 으레 그렇듯 한 번에 이해할 수가 없다. 시련이 지나치고 피로가 지나쳐서 화가 났다고 하자. 그건 납득이 되는데 왜 성을 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분노란 최후의 수단이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달성하지 못했을 때 최후의, 최후의 수단으로 인간은 분노한다’ 라는 내용. 이를 고려하면 윤동주가 왜 화조차 내지 못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는 분노라는 최후의 수단도 통하지 않는 존재와 마주한 것이다.
그 존재는 ‘소시민성’이다. 윤동주의 친우 정병욱의 회고에 따르면 윤동주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벼루를 던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들이 말을 안 듣고 돈이 안 되는 문과에 가겠다고 한 까닭이다. “문과에 가봤자 기자밖에 더 되겠느냐”라고 타일렀지만 그래도 고집을 꺾을 수 없자 벼루를 던졌다고 한다. 돈이 안 되는 이유로 의예과를 강요하는 아버지, 현실적으로 독립은 불가하니 일제에 복종하는 민중들, 투쟁 대신 시를 쓰는 자신. 이처럼 소시민성은 사회 곳곳에, 심지어 시인의 마음 깊숙한 곳에도 흩뿌려진 존재였다. 또 위 일화를 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는가? 큰 이질감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는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윤동주는 한 세기 전 사람이지만 이런 일화는 크게 낯설지 않다. 21세기에도 직접 겪거나 혹은 들어볼 법한 이야기이다. 필자 역시 일화를 보며 시대가 달라도 사람 사는 세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 사는 세상 크게 다르지 않구나’라는 생각, 21세기의 내가 20세기의 윤동주를 보며 한 생각을 윤동주는 하지 않았을까? 그가 동경했던 백석, 정지용 같은 사람들의 삶에서 그 어떤 동질감도 찾지 못했을까? 분명 윤동주도 19세기 사람을 보며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 다 똑같구나 하며.
모든 권력이 그렇듯 일제라는 거악도 무너졌다. 그러나 일제가 무너져도 누군가는 부당한 권력 앞에 굴복할 것이고 또 그러한 현실을 후대에 강제한다. ‘현실’이란 명목으로 ‘조언’이라 부르며. 또한 누군가는 시를 써서 괴로운 이에게 “병이 없다”고 말하며 나아가 벼루를 던졌을 지도 모른다. 이를 고려하면 윤동주가 왜 화조차 내지 못했는지 짐작이 간다. 분노라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도 해결할 수 없는 불치병이 역사의 무게로 짓누르니 감히 성을 낼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시 ‘병원’의 훌륭한 점은 분노조차 할 수 없는 그 좌절 뒤에 나온다. 이 시는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라는 구절로 마무리 지어진다. 즉, 윤동주는 분노라는 최후의 수단이 좌절되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기어코 ‘치유’라는 수단을 찾아낸 것이다.
정병욱의 회고에 따르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알려진 시집의 원제는 ‘병원’이었다고 한다. 이 제목은 병이 병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치유해주고자 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윤동주는 시로써 병, 즉 소시민성을 치유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 병이 치료하기 힘든 이유는 병자가 고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시로써 병을 자각시키고 치유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보이지 않는 질병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분노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좌절을 딛고 치료책까지 찾았다. 그랬던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윤동주의 시대가 ‘병이 병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시대였다면 필자가 보기에 지금 이 시대는 병을 찾기 위해 살갗을 찢어발기는 시대인 듯 하다. 사람들은 이제 칼을 들고 피부 아래 감춰진 상처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그 명목하에 보이는 살갗은 모조리 찢고 있다. 그 행위로 인해 없던 상처가 생기고 있던 상처는 더욱 깊어가고 있다. 또한 이들은 상처를 발견만 하고 치유하고자 하지 않는다. 치유의 수단이어야 할 진단이 목적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상처는 상처를 낳고 병은 병을 낳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스스로를 정당화 하며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세태는 이 시대의 새로운 ‘병이 병인지조차 모르는 병’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1위로 윤동주가 뽑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는 이 시대의 사람들도 무의식적으로 치유를 바라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그만 칼을 놓고 병원에 갈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