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옥 파견교사 (교육학 전공)

때는 2007년. 베트남 열풍을 넘어 광풍이 불던 시절로 TV를 틀면 여기저기서 베트남 관련 프로그램이 연일 화면을 가득 채웠다. 고사 출제와 생기부 등등 정신없는 연말을 보내던 중 동료교사가 베트남 호치민국제학교(당시는 베트남 호치민한국학교였다.)의 생물(과학)교사 추가 공고가 떴다는 소식을 전했다. 평소에 재외국민학교에 내가 관심이 있던 것을 아는 선생님들이 지원해 보라고 옆구리를 찔렀다. 기한이 촉박했던지라 원서접수와 면접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 때가 교사생활 9년차 되던 해였는데, 처음으로 자기소개서라는 것을 쓰면서 교직관 등을 돌아보게 되었고 부끄럽지만 나에 대한 장점과 능력을 최대한 포장하여 칸을 메꿨다. 교육계획서도 베트남자료를 검색해가며 꼼꼼하게 작성하였고 떨렸던 면접에서는 해외에 살고 있는 언니 내외를 언급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할 것을 많이 어필했던 기억이 난다.

드디어 기다리던 합격메일을 받았다! 추가합격자라 짐을 꾸려 떠나기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부랴부랴 꾸린 짐과 함께 떠난 베트남행 비행기 안. 목적지인 호치민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습해지는 기내 공기와 베트남 노랫소리가 어우러져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공항에 내렸을 때 후텁지근한 공기와 함께 내 이름이 써진 종이를 들고 꽃다발로 맞이해준 행정실 직원들을 보니 뭔가 마음이 찡했다. ‘아, 내가 드디어 베트남에 왔구나.’싶었다 도착 후 집을 구하기까지 호텔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학교 측에서 배려를 해 주었고, 동료교사들과 함께 푸미흥(미국으로 치면 LA 한인 타운 같은 곳이다.)에서 집을 구해서 아래 위층으로 같이 지내니 외롭지 않고 좋았다. 설렘과 함께 처음으로 방문한 학교는 베트남 풍으로 지어져 크고 깔끔했다. 학교는 초, 중, 고등학교가 다 같이 사용했고, 원형으로 지어진 건물 가운데 있는 정원이 참 예뻤다. 베트남한국학교에서 제일 힘들었던 점은 수업부담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였다. 중2부터 고1, 2, 3학년까지 4개 학년 수업 준비를 해야 하니 정말 바빴다. 아이들도 정말 다양했다. 국제학교에 다니다 온 학생, 한국에서 주재원이신 부모님을 따라온 학생, 다문화 가정 학생까지, 다양한 배경과 학업수준도 제각각이라 수업할 때 수준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교사 간에도 구성원이 다양했는데, 한국과 베트남 두 곳에서 월급을 받는 파견교사, 한국에선 휴직처리가 되고 베트남에서 월급을 받는 고용휴직교사(나는 여기에 속했다.), 기간제 교사, 시간강사가 섞여있었다. 교사들은 전국에서 뽑혀왔고 여기에 외국인교사까지 섞이니 이렇게 다양한 조합을 학교에서 접할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초등학교는 한국인과 외국인교사로 두 명의 담임제였고, 간혹 중학교에서 외국인교사와 코티칭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학교형태는 준사립형태로 매년 한국에서 운송해 온 한국교과서를 썼지만 한국교육과정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고, 영어수업 비중이 다른 과목보다 월등히 높았던 점이 특이했다.

전 세계에 있는 재외국민학교 중 상위에 들 정도로 큰 학교였지만 업무가 많았다. 담임업무에, 행정업무에, 수업준비에 학교에서는 늘 정신이 없었지만 한국과 달리 방과 후엔 문을 걸어 잠갔고 봄, 가을 1주일간 짧은 방학과 여름, 겨울 방학이 있어 모든 힘듦을 씻어주었다. 베트남에서 있는 동안 수업이 끝나면 동기선생님들과 베트남 등지를 누비고 다녔다. 베트남 음식도 자주 먹으러 다녔고 주말엔 일일투어를 하기도 했다.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던 나에겐 한국식으로 나오는 급식이 꿀맛이었고, 한국음식이 정 그리울 땐 한국식당에 가기도 했다.

힘든 점도 많았지만 돌아보면 평생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추억을 쌓게 된 시간이었다. 때론 향수병처럼 한국이 그리워 울적해지던 때도 있었지만 힘든 기억보다는 좋았던 점이 더 많이 떠오른다. 지금도 스콜처럼 쏟아지는 비를 볼 때면 베트남 향신료와 함께 베트남 사람들의 순박한 미소가 오버랩 되어 어느덧 15년이 다 되어가는 베트남 호치민으로 나를 소환시킨다. 제 2의 고향과 같은 호치민, 늘 나에게는 그립고 아련한 추억속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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