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교수의 서재에서는 중국어교육과 김준수 교수와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김준수 교수는 언어 순수주의에 딴지를 거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책,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를 소개하였다. 슬리퍼는 써도 되고, 쓰레빠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생각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책의 세계로 들어가 그 답을 확인해보자.

 

◇ 학생 시절, 가장 감명 깊게 읽으셨던 책은 무엇인가요?

그때가 제가 대만에서 공부하던 시절이었는데요, 새로 유학 온 한국 후배 하나가 저와 언어에 대한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고는 고종석이 쓴 ‘감염된 언어’를 읽어봤냐고 묻더군요. 아직 못 읽어본 책이었는데, 그 후배로부터 대충 책 내용을 들어보니 관심이 급발동했습니다. 그래서 메모해 두었다가 방학 때 한국에 들어와서 바로 구매해 읽었는데, 너무 흥미진진해서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을 쭉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기억을 반추해 보니, 제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우리말·우리글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저자께서 비교적 저의 취향에 맞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당시 제가 몇 년째 중국어로 된 딱딱한 내용의 전공서적만 읽고 있었던 터라, 간만에 우리말로 쓰여진 책을 읽으며 모국어 안에서 느끼는 편안함에 푹 빠졌던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교수의 서재’ 코너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 때, 순간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책이 바로 이 ‘감염된 언어’가 아니었나 싶고요, 정말 크게 감명 받은 책을 꼽자면 제 전공분야에서 몇 권이 떠오릅니다만, 너무 전문적인 내용을 다룬 책들이라 이 자리에서 소개하기에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감염된 언어’도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말을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 평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던 학생이라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몇 가지 내용 중 한두 꼭지라도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을 들고 나왔습니다.

 

◇ ‘감염된 언어’는 어떤 책인가요?

이 책은 부제인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에서 엿볼 수가 있듯이, 저자께서 우리 사회에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몇 개의 어문(語文)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자신의 관점으로 논지를 펴신 책입니다. 전반부에서 저자의 언어순수주의에 거는 딴죽이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데, 저는 제 평소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상당 부분 일치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매우 즐겁게 가슴 두근거리면서 읽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제에 대한 제 평소 생각이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는 결이 달랐기에 늘 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살았던지라,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일종의 해방감(?)마저도 느꼈습니다.

요즘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는데, 8~90년대에 제가 받았던 우리나라의 공교육에서는 은연 중에 우리 고유의 것이 제일 좋고, 외래의 것은 우리의 순수성을 해치는 잡된 것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이어가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국어 교육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외래어는 대체로 사용을 삼가야 하는 것으로 배웠고, 특히나 일본어에서 건너온 외래어의 경우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역사 탓인지 무심코 그것을 사용하기라도 하면 민족반역자라도 된 듯한 질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가급적이면 고유어를 살려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괜스레 있어 보이려고 외래어를 왕창 넣어서 글을 쓰면 일반 언중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지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보그 병신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을 겁니다.

그런데 실제 언어환경에서는 ‘슬리퍼’와 ‘쓰레빠’가 각기의 의미영역을 가지고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전자는 영어 ‘slipper’에서 왔기에 써도 되고, 후자는 일본어 ‘スリッパ(스립빠)’에서 왔기에 써서는 안 되는 말로 규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예문을 두 개 들어보겠습니다. “아까 보니 철수는 티쪼까리 하나 걸치고 (ⓐ) 찍찍 끌면서 마트 가던데.” “고객님, (ⓑ) 그쪽에 있으니 갈아 신고 들어오십시오.” 여러분 모두 ⓐ와 ⓑ에 무엇이 들어갈지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와 ⓑ는 함부로 바꿔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둘 중 어느 하나로 통일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떠오르는대로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카스테라’라는 말은 현재 비표준어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카스테라’의 표준어는 포르투갈어 ‘castela’에 기반한 ‘카스텔라’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우리는 그 달콤한 빵을 포르투갈이 아닌 일본에서 받아들였기에 일본어 ‘カステラ(카스떼라)’를 본떠 ‘카스테라’라고 하는 것이지요. 물론 지난 수십년 동안 어떻게 말하고 살았던지간에 이제라도 일본식 발음 따위는 버리고 원어에 맞춰서 ‘카스텔라’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중의 습관을 무시한 이런 처사가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득 한때 화제가 되었던 ‘자장면’이 떠오르네요. 다행히 이제는 맘 놓고 ‘짜장면’이라고 해도 되고, ‘간짜장’·‘짬짜면’ 다 괜찮습니다.

먹거리 이름으로 예를 든 김에, ‘앙꼬’를 거론해 보겠습니다. ‘앙꼬’는 일본어 ‘餡子(앙꼬)’에서 온 말로 팥소라는 뜻입니다. 과거 널리 쓰이던 말이지만, 이 말을 쓰면 근엄한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며 꾸짖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제는 그리 흔하게 쓰이는 말은 아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관용구는 여전히 종종 쓰입니다. 국어 순화주의자들이 아무리 ‘팥소’로 ‘앙꼬’를 대체하고 싶어해도 ‘팥소 없는 찐빵’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어떤 단어가 관용구에 들어가면 굉장히 질긴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고유어인 ‘부아’와 ‘배알’은 각각 한자계 외래어인 ‘폐(肺)’와 ‘창자(腸子)’에 밀려서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지만, ‘부아가 치민다’·‘배알이 꼴린다’와 같은 관용구는 여전히 우리말 속에서 생생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요. 이제는 앵무새를 ‘잉꼬’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만, ‘잉꼬부부’라는 말은 여전히 쓰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며칠전에도 TV를 보니 어떤 토크쇼 진행자가 ‘잉꼬부부’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아, ‘잉꼬’는 일본어 ‘鸚哥(잉꼬)’에서 온 말입니다. 이제 다시 ‘앙꼬’로 돌아오겠습니다. 그간의 지속적인 국어 순화운동으로 이 ‘앙꼬’라는 외래어는 이제 거의 우리말에서 축출된 듯이 보입니다만, 몇년전부터 잘한다는 빵집이나 커피숍에 찾아가보면 ‘앙버터빵’이라는 것을 팔고 있더군요. 주지하듯 이 ‘앙버터빵’은 일본에서 온 먹거리이고, 첫글자 ‘앙’이 바로 ‘앙꼬’의 ‘앙’입니다. 일본어에서는 팥소라는 뜻인 ‘앙꼬’를 줄여서 ‘앙’이라고도 하거든요. 지난 수십년 동안 공교육 및 매스컴을 총동원해서 일종의 국민 계몽운동(?)을 벌인 결과 ‘앙꼬’라는 단어를 우리말 어휘 목록에서 가까스로 거의 지워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어쩌면 조금은 허무하게도 ‘앙버터빵’을 통해서 ‘앙’이라는 일본어는 우리말에 다시 버젓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앙버터빵’을 ‘팥소버터빵’이라고 써놓고 장사하는 집은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외래어를 음역하지 않고 의역하면 의미 전달에는 훨씬 유리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앙버터’보다 ‘팥소버터’가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갈릭’ 어쩌구 하는 그 많은 서양요리 이름에서는 ‘마늘’이라는 좋은 우리말이 버젓이 있는데, 왜 굳이 ‘갈릭’이라고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쓰다보니 좀 길어졌는데, 외래어를 무조건 우리말의 순수성을 해치는 잡된 성분으로만 볼 것이 아니고, 외래어에는 우리말의 어휘를 풍부하게 해주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저와 저자의 생각이 일치하였습니다. 영어가 지금처럼 방대한 어휘를 갖게 된 것은 라틴어·프랑스어를 위시한 다른 언어에서 게걸스럽게 어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또한 아무래도 제 전공이 한자학(漢字學)이다보니 이 책의 한 꼭지인 ‘버리고 싶은 유산, 버릴 수 없는 유산 -한자에 대한 단상’은 그야말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서 읽었었는데요, “내게는 한글전용과 한자교육이 서로 길항하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실마리를 푼 저자는 “우리말 어휘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자어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면 2000자 내외의 학습이 부당한 뇌 혹사는 아닐 것”이라는 말로 끝맺습니다. 사실상 과거 우리 사회에서 진행된 한자교육에 대한 논쟁에는 찬반 양측 모두 이상하게 변질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대측에서는 상대방에게 사대주의자라는 비판을 퍼붓기 일쑤였고, 찬성측에서는 급기야 우리 조상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웃지 못할 괴설까지 들고 나왔었습니다. 윗 세대의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찬찬히 이 문제를 고민해 보고 싶은 학생들에게 이 책의 이 꼭지를 한번 꼼꼼히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여러분도 음식 관련된 예능 프로그램이나 먹방 즐겨보지요? 그런데 지상파 방송을 보면 출연자들의 말과 자막이 엇갈리는 경우가 종종 보입니다. 분명히 모든 출연자가 다 ‘계란’이라고 하는데, 자막은 ‘달걀’로 바뀌어 깔리는 괴이쩍은 현상 말입니다. 여기에는 아마도 고유어 ‘달걀’로 한자어 ‘계란’을 몰아내보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한자어도 분명히 우리말의 구성원일뿐만 아니라 ‘계란(鷄卵)’이란 한자어는 우리말에서 ‘양계장(養鷄場)’·‘삼계탕(蔘鷄湯)’·‘오골계(烏骨鷄)’ 등의 어휘와 단단히 묶여 있습니다. 아, ‘계(鷄)’라는 형태소 기준으로 봤을 때 이렇다는 것이고요, ‘란(卵)’을 기준으로 보면 이 역시 ‘산란(産卵)’·‘난생(卵生)’·‘난각(卵殼)’ 등의 어휘와 강력한 스크럼을 짜고 우리말의 어휘 목록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언중의 습관을 정면으로 거스르면서까지 ‘계란’이란 한자어 하나 몰아내려고 애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출연자들의 말과 자막이 엇갈리는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출연자들이 말은 ‘야채’라고 하는데, 자막은 ‘채소’로 바뀌어 깔립니다. 이 경우에는 둘 다 한자어인데, 우리말 ‘야채’가 일본어 ‘野菜(야사이)’에서 왔다고 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野菜’는 중국 옛문헌에도 그 쓰임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시인 두순학(杜荀鶴)의 작품 ‘산중과부(山中寡婦)’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時挑野菜和根煮, 旋斫生柴帶葉燒.(늘상 들나물을 캐 와서는 뿌리채 삶는데, 갓 해 온 나무를 잎도 털어내지 않고 땔감으로 쓴다네)” 자 그러니 이제 우리는 ‘야채’라는 말을 마음 놓고 써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봅시다. 중국제 한자어라면 써도 괜찮고, 일본제 한자어라면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좀 유치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말이죠, 본래 ‘들나물’을 뜻하는 ‘野菜’가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현대 한국어에서 ‘밭에서 가꾼 농작물’이라는 의미로 좀 바뀌어 쓰인다고 칩시다. 그래도 저는 ‘채소’는 되고, ‘야채’는 안 된다는 논지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사회(社會)’·‘의식(意識)’·‘주의(主義)’ 등등 이루 다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수량의 서구에서 비롯된 개념어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한자라는 그릇에 옮겨 담겼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께서는 순수주의자들이 일본제 한자어에 특히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말들(일본제 한자어)을 솎아낸다면 한국어는 정말 빈약하고 볼품없는 언어가 되고 말 것”이라고 일갈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 학생들이 언어 쇼비니즘에 경도된 선전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관점을 갖게 되기를 바라며 이만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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