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사코는 오코노미야키를 만들고 있고, 초대된 두 남자인 쿠시하시와 료헤이는 아사코의 절친 마야의 TV 연기를 감상하고 있다. 연기가 끝나자 료헤이는 마야의 연기에 칭송을 덧붙이지만 쿠시하시는 친구한테 칭찬 듣고 싶어서 연기를 하느냐는, 예술적 자아에 도취된 폭언을 날린다. 상황은 어이없을 정도로 냉혹하게 얼어붙고 주선자의 입장인 료헤이는 마야를 위로한답시고 지금 떠나면 저렇게 좋은 사람을 붙잡을 기회는 없을 거라며 쿠시하시를 말린다. 그 한 마디에 쿠시하시는 무릎을 꿇고 잘못 말했다며 마야의 용서를 구한다.
이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았던 건 거실 한가운데에 떡하니 끼워져 있던 사각형 창틀 때문이었다. 그 틀은 부엌에서 거실로 말을 걸기 위해 만들어진 틀로 보였는데 도리어 영화에선 거실에서 부엌으로, 마야가 아사코에게 말을 건다. 확실한 건 아사코와 나머지 세 사람(이 벌이는 유사-극)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 발산되는 저 틀의 영향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아사코임에도 아사코는 세 사람의 갈등에 끼어들지 못한다. 저 장면에서 아사코의 역할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아사코가 만드는 오코노미야키 맛에 분위기가 달려 있다”는 마야의 말에 가볍게 동조하는 것이다. 만약 창틀이 없었다면 좀 전의 냉혹함 도중 한 사람이 아사코를 바라보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 도플갱어의 환상
<아사코>를 보면서 조금의 당혹감이라도 느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구든 오사카에서 바쿠가 문을 열고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놀랄 것이고, 그 다음 식당 장면에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장면이 결정적인 영화의 전환점이기 때문인가. 만약에 영화의 흐름 — 만듦새와 관련된 기술적 유려함이 아닌 테마를 지정하고 장르를 의식하는, 이야기로써 약속된 흐름이 (예측 가능할 만큼) 뚜렷하다면 납득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못한 이유는 <아사코>의 주된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은 주변부에 변화를 채우는 행위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인공 사이의 갈등이 상황으로 드러나는 게 영화의 이야기라면 <아사코>의 이야기는 “이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고 생각한다. ‘2년 후’ 자막의 직전과 직후에 등장하는 바쿠와 료헤이는 같은 얼굴을 가졌다 싶어도 될 정도로 닮은 사람이다. 아무 정보도 없이 보았다면 그 순간은 바쿠가 료헤이라는 가명을 쓴 채 아사코를 모르는 척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둘이 정확히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임을 알게 된다.
왜 그런지는 아사코의 반응을 보는 대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쿠와 몹시 닮은 료헤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아사코는 료헤이를 똑같은 다른 사람으로 대하지 못한다. 바쿠를 모르니 아사코의 도쿄 지인들은 그 영문을 알 수 없고,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친구를 맺는다.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왜 그런지 알지 못한다. 영화의 관계도, 연기하는 주인공들도 왜 그러는지 모르는 것처럼,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착착 배치되어 나간다. 저 관계가 모두 아사코의 ‘주변’으로 엮인 지도라는 것도 명백해 보인다. — 아사코를 아는 사람들끼리 ‘아사코를 아는 사람’이란 자리를 공유한다.
조금 성급한 확정이다. 다른 이유라면 두 캐릭터를 한 명의 배우가 연기했다는 사실이 있지만, 영화 내에서 왜 둘의 얼굴이 같은지를 수학적으로 증명해주진 못한다. 바쿠와의 만남이 이후의 분량에 비해 짧아서 그런지 몰라도 이후에 아사코가 아는 것을 주변의 인물들은 영영 알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다르게 말해서 바쿠는 정말 아사코에게 ‘바쿠’를 진술하기 위해서 등장했을 뿐이다.
◇ 시간보다는 지역, 도쿄와 오사카의 사람들
내게 이 영화의 충격적인 순간은 크게 두 번이었다. 한 번은 바쿠가 오사카에 정착하기 위한 아사코의 새 집 문을 두드리는 순간이었고, 다른 한 번은 바쿠가 처음 아사코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첫 번째는 사건 자체의 돌발성 때문이었지만 두 번째는 편집 탓이었던 것 같다. 아사코의 궤적을 감시하듯 지나치는 바쿠를 이제 공통의 위치에 놓고 보겠다는 듯 영상의 지속을 멈추고 스스로 갑작스러운 순간임을 인식하고 있는 게 느껴졌었다. 그러고 보면 사실 바쿠는 언제나 사라질 때도 나타날 때도 갑작스러웠다.
<아사코>에서 지역의 아우라를 논하는 게 얼마나 유효한 일일까. 지역 그 자체의 무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영화도 종종 조망하는 특정의 바다들이다. <아사코>가 반복하는 형태들은 수없이 많지만 독자적으로, 아니면 뒤의 배경으로도 쉼 없이 출렁거리는 바다의 형태는 크던 작던 스스로의 광대함을 잊게 만든다. <아사코>에는 크게 오사카와 도쿄를 포함해 도호쿠, 북해도 등의 지역이 등장하는데, 도호쿠와 북해도에서의 바다가 기억이 나는가.
영화에서 지역의 동선이 처음 두드러지는 게 언제였을까. 바쿠가 갑작스럽게 식당에 찾아오면서부터였을까. 거꾸로 올라가보면 바쿠가 사라지고 2년 후의 배경은 아예 오사카에서 도쿄로 바뀌어 있다. 여기에서의 사람들은 모두 도쿄에서 만난 지인들이며 도쿄에서의 미래를 계획한다. 그러나 5년이 지났을 즈음, 료헤이와 아사코는 오사카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며 아사코의 오사카 시절 절친이었던 하루요가 도쿄에서의 일상에 스며든다. 이렇게 보면 지역이라는 테마는 잊히기에 앞서 인물의 변화를 고정시키려는 암시 체제에 가까워 보인다. 인물에 함께 잠입된 지역이라는 기표는 바쿠가 아사코를 차에 태워 먼 거리를 이동함에 따라 다시 돌아오기 위한 구체적인 과제의 형상으로 발돋움한다. 그러나 여기서 도호쿠에서 도쿄까지를 잇는 -똑같은 야밤의 고속도로-길은 그만큼 먼 길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점을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 충격/충동의 증폭적 계열성
아사코와 료헤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변한다. 하루요는 성형을 했다고 했고, 쿠시하시는 첫 등장 이후로 점점 나이를 먹은 모습이 되어간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오카자키일 텐데 그의 변화가 누구보다 두드러져 보이는 건 아마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아사코가 직접 찾아간 인물인 탓일 것이다. 그곳에서 아사코는 눈물을 흘리는데 (오카자키의 엄마인) 에이코에게 응답된 눈물의 이유는 결국 자기를 자책하는 결론으로 귀결되어 있다.
우리가 <아사코>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닮은 것을 넘어서 똑같은 두 얼굴에 관한 아사코의 반응이다. 결국 <아사코>는 그 반응에 관한 영화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넘칠 정도로 개인적인 일상들의 조밀함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한 순간 한 순간이 그런 일상을 구성하는 개인적 기억, 발자취들이 드러나는 데서 오는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사코에게 있어서 당연하게도 그것은 바쿠를 만났던 찰나이다.
충격과 충동은 다르다. 충격은 외부에 원인을 둔 자극과 영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충동은 행동을 향한 욕망으로부터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극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아사코>는 충격과 충동을 구분 짓기보다 충격에 맞서는 것에 주력한다. 바쿠의 얼굴이 (료헤이의 얼굴이라는 과정으로 인해) 닳고 닳아 없어질 때마다 도플갱어라는 현상 아래에 ‘진짜’ 바쿠의 존재는 더욱 일그러져서 돌출된다. 이 유독 두드러진 형상은 어디서 튀어나오더라도 영화 전체를 강하게 흔들어버릴 것만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지막 길을 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아사코>는 미세한 움직임들을 반복한다. 움직임이라는 것은 문장의 성분 바깥에서 문장이 흘러가기 위한 길의 모습이다. 그리고 아주 다급하게 그 움직임이 한 번 큰 진폭의 움직임으로 대체된다. 료헤이를 작게 보일만큼 광막한 풍경 숏이나, 멀어지는 차창 속으로 손을 흔드는 아사코의 모습이라던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다와 마주 선 아사코의 얼굴이라던가.
바쿠가 아사코에게 다가갈 때와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다가갈 때 같은 트래킹이 사용된 것이 기억나는지. 결국 이 영화의 방법론은 무언가를 보이고 무언가를 동작하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무언가에 관한 것이라 여겨진다. 북해도에서 내린 순간부터 료헤이의 곁에 다시 있기까지 아사코는 여전히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이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영화로써는 가능한 한 가장 확신에 찬 결정이 되지 않을까.
현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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