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 <문화스쿼시>: 한국사회의 변화와 대학문화사: (2)1970년대 대학문화
1970년대는 ‘청년문화’의 전성기였다. ‘청년문화’는 지금처럼 대학생이 많지 않던 시절 대학문화를 포함하는 20대 젊은이들의 문화를 포괄적으로 담아내는 말이다. 1970년대 초반 ‘청년문화’를 둘러싼 논쟁이 신문 지면에서 벌어질 정도로 이 용어는 70년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현상이었다.
청년문화의 태동은 196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이 한국사회만의 독특한 것으로 등장했다기보다는 전 세계적인 문화적 흐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68혁명과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히피운동 등 사회적‧문화적으로 청년 세대의 새로운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1970년대 초반 한국을 비롯한 중국에서도 히피족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국내의 경우 히피족이 입국할 경우 공항에서 머리를 자르고 입국할 수 있도록 하고, 유흥업소 등에서 다양한 형태의 전위운동을 단속하는 법령을 개정한다.
그 중 히피문화와 비틀즈의 영향으로 등장한 ‘장발족’은 집중적인 단속대상이 되었다. 1970년 8월 28일 서울시경은 ‘히피족’ 일제소탕에 나서 15개 관할경찰서에서 하룻밤 사이에 장발족 6백77명을 적발했다. 이때 경찰이 내세운 처벌법규는 형범 제245조(공연음란죄)와 경범죄처벌법 144호(신체노출), 동28호(폭언소란), 동27호(부랑, 허무감), 동12호(업무방해) 등인데, ‘허무감’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1971년 7월에도 전국 5대도시에서 대대적인 ‘장발족’ 단속이 이뤄져서 4천여 명이 적발되었다. 구성원을 살펴보면, 학생과 연예인, 유흥업소 종업원, 구두닦이, 부랑아 등이었다. 이들에게 적용되는 법은 ‘경범죄처벌법’ 제1조27호 ‘타인에게 혐오감을 줌’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들 장발족을 가리켜 ‘인간상록수’라고도 불렀으며, 정부의 장발 단속에 대해 젊은이들은 ‘자연파괴자’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장발만 단속한 게 아니다. 1970년 9월 11일부터는 ‘방견(放犬) 일제단속’도 벌인 바 있다.
이러한 단속은 1973년 3월 10일 경범죄 관련법 개정안이 발효되면서 더욱 확대된다. ‘개정경범죄처벌법’은 “휴지나 담배꽁초 버리기, 침뱉기와 껌뱉기, 초미니스커트나 속살까지 투시되는 옷입기, 유언비어 퍼뜨리기, 남자의 장발과 홀태바지입기, 비밀댄스홀 출입, 암표 팔기, 새치기, 금지구역 출입, 폭발물의 조작과 장난 등”을 처벌대상으로 추가했다. 이는 억압적 국가체제가 일상에서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청년문화가 패션과 음악 등 주로 감각적인 측면에 머무른 것도 어쩌면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청년문화를 특징짓는 또다른 키워드로는 ‘생맥주, 청바지, 통기타’(줄임말로 ‘생청통’이라 부름)이다. 작년 연말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세시봉 친구들’은 통기타로 표현되는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그 외에도 김민기, 양희은, 한 대수, 이장희 등도 당시의 대표적인 통기타 가수들이다. 그 중 윤형주와 송창식은 무교동의 ‘세시봉’에서 처음 만나 ‘트윈폴리오’를 결성하면서 한국 통기타음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통기타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포크 음악이 반사회적, 반전의 메시지를 전ㄷ라했다면, 한국의 통기타는 트로트에서 음악적 전승이 이뤄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청년세대의 일시적 호응에 그칠 것이라는 진단도 있었다. 그럼에도 통기타 음악과 그 가수들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청바지 역시 비슷한 시기에 이들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생맥주의 경우에는 쌀막걸리의 제조 중단 이후 대중화된 것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나 흉내내는 통기타, 철학이 없는 생맥주 등의 신랄한 비판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75년 대마초 일제단속 사건에서 신중현, 윤형주, 이장희, 김추자(입건) 등 유명 가수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이는 한국 대중문화사에 있어서 가장 암울한 시기로 기록될 만하다. 이듬 해 2월 박정희 대통령이 대마초 흡연자에 대해 현행법의 최고형을 적용하여 엄벌하겠다고 밝히면서 단속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1976년 말에는 단속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1천명이 넘는 대마초 사범을 검거하기도 했다.
그 후 1977년 9월 ‘제1회 MBC 대학가요제’는 대학문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출신 가수들이 데뷔하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대학가요제’는 1980년대까지 가수 등용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특히 유신정권 하에서 대마초 파동과 금지곡 선정 등 대중가요의 영역이 축소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가요제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1970년대 말에 들어서면 대학문화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이화여대의 ‘메이퀸’ 행사의 중단을 들 수 있다. 1908년 이후 계속되었던 행사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학생들의 반발로 인해 취소된 것이다. ‘유신헌법’을 통한 독재정권은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교육장치와 경제발전이라는 토대강화를 무기로 국민대중을 통치했다. 억압적인 박정희 정권은 개인의 취향과 표현을 통제함으로써 대중음악을 비롯한 문화예술 전반의 침체를 가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청년문화는 ‘우울한 청춘과 개인화된 낭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