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인생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82년을 살아온 평생 동안 시대의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왔다. 그 중 앞의 절반은 식민 지배와 6·25 전쟁, 그 후의 가난과 혼란의 와중에서 살아온 그 시절의 대부분 한국인들처럼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아낙의 삶이었다. 그러던 중에 1970년,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일하던 큰아들 전태일의 극단적인 선택을 본 뒤로 그녀는 아들의 뜻을 이어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의 권리와 자유롭게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 싸우는 투사가 된다. 이 때 그녀의 나이 41세. 정확히 그녀가 살아온 날의 절반을 온전히 아들의 한, 아니 그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기 위해, 또한 주변의 이웃을 위해 바쳤다. 그렇다. 한이 아니라 꿈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들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2살이었다. 오늘날의 또래들 같았으면 한창 대학교에 다니거나 군대에 가 있을 나이. 그러나 그의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대학에 가지 않고 일찍부터 노동자로 생활 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그런데 공장에는 그보다 더 어린 나이의 ‘여공’들이 있었다. 대부분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치고 바로 취직하여 열악한 조건에서 장시간 노동을 했다. 그럼에도 정당한 대접을 받기는커녕 걸핏하면 임금이 체불되거나, 고용주나 감독자들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아주 짧은 식사와 휴식 시간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상황을 본 청년 전태일은 자신과 동료들의 권리를 위해 노동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때의 노동법은 지금과 비교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고도 경제성장을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정주영의 공을 찬양하지만, 그 경제성장을 가장 밑에서 떠받친 노동자들의 존재를 잊고 지나간다. 지금도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는 한국의 수출 제조업은 저임금과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또한 사회 질서를 명분으로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철저히 차단되었다. ‘국민의 기본권’과 ‘노동자의 권리 보장’이 분명히 헌법에 쓰여 있었지만, 당시 정부는 이것의 존재를 모르는 듯 시민들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악덕 기업주들을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이소선 역사는 군사독재 정권과 맞서 노동권과 시민적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선봉장이 되었다. 그녀는 전태일의 어머니를 넘어 모든 대한민국 노동자와 시민의 어머니가 되었다. 1976년의 동일방직 사건, 1979년 YH무역 사건 등의 주요 노동 쟁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응원하였다. 1986년부터 1993년까지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0년 계엄령으로 수배된 이후 세 번의 감옥 생활을 했고, 다른 민주화운동 수배자들을 숨겨 주기도 했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노동 현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한시도 쉴 틈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정부와 기업들에게 사태의 해결을 촉구했다.
1990년대가 되자 노동자들의 임금이 대폭 늘어나고 ‘강성노조’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일부 기업에서는 노동자들의 권한이 매우 강해졌다. 노동 운동이 이렇게 한숨 돌릴까 하던 차에, IMF 외환위기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한다. 노동계도 ‘고통 분담’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정리해고가 법적으로 허용되고, 임시직과 파트타임 노동자가 대폭으로 증가하였다. 사회 안전망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 유연성을 늘리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있어 삶의 불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 갔지만 이소선 여사는 또다시 나서 싸워야만 했다.
이랜드에서, 기륭전자에서, 쌍용자동차에서, 한진중공업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이 모든 자리에 이소선 여사는 직접 발품을 팔고 찾아가 자신의 아들을 생각하며 힘을 내라고, 우리의 마땅한 권리를 찾자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힘 닿는 대로 노동 현장을 돌아다니던 그녀가 결국 세월의 무게와 평생 투쟁으로 지친 몸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쓰러졌다. 그렇게 한동안 병원에 누워있다 2011년 9월 2일, 영원한 안식을 찾아 이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이고 아들과 함께 아직도 갈 길이 먼 한국의 노동현실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전태일이 살던 때의 ‘여공’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다른 형태와 이름으로 계속 존재하고 있다.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백화점과 슈퍼마켓에서, 핸드폰 가게, 주유소, 콜센터 등에서 일하는 ‘알바’들은 법정 최저임금을 겨우 넘기거나 그보다도 못한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혹시라도 옛날의 공장 일보다 편한 것이라고 말하는 우는 범하지 말기를. 손님들이 어떤 모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더라도 항상 웃는 얼굴로 그들을 대해야하는 ‘서비스업’이 어떤 면에선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르니까.
- 기자명 김진우 기자
- 입력 2018.12.1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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