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친구와 술 한잔 하며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도 친구와 술 한잔 하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는 오늘 우연히 식당에서 내 뒷자리에 앉은 청년이다. 식당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커다란 방이었기 때문에, 손님들은 다리도 접어서 앉아야 하고, 테이블은 거의 빽빽이 붙어있어 뒷자리의 얼굴도 모르는 ‘그’와 나는 거의 등을 맞댈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좁은 식당 안은 온통 하루 일과를 끝내고 모여든 ‘친구와 술 한잔’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학가 근처 작은 식당의 훈훈한 저녁 풍경...
자리가 너무 가까웠으므로 나는 반 강제(?)로 내 등 뒤에 앉은 얼굴도 모르는 ‘그’ A와 친구 B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맘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대화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나도 내 앞에서 밥을 열심히 먹던 내 친구와 대화 중 이었기 때문에 내 등 뒤 그 이름 모를 청년들의 목소리는 처음엔 잔잔한 배경 음악 쯤 이었다. 그러나 그 ‘배경 음악’에 어느새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되었고, 정작 내 앞의 내 친구는 잠시 잊게 되었다. 왜냐하면 듣다보니 나는 A가 심각한 언어 장애를 가진 것을 눈치 채게 되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말을 그의 친구 B는 다 알아들으며 대화의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B: 야. 너 요즘 왜 그래? 그리고 그 여자랑은 잘 되어 가냐?
A: rrrrrrrrrrrrr
B: 그래? 그래서 뭐가 문젠데?
A: rrrrrrrrrrrrr
B: 야, 이 자식, 너. 그만 좀 투덜거려. 원래 그런 거야... 좀 진도 좀 나가라..
외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살아와서 그런지 나는 ‘직업병’처럼 ‘소통’의 문제에 관심이 많다. A의 언어 장애는 언젠가 만났던 뇌병변 장애 학생들과 비교해보아도 매우 심한 수준으로 짐작되었다. 그러나 두 친구의 대화의 흐름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냥 20대 청년들의 대화. 서로 구박도 하고 냉소도 던지며 욕 같은 추임새도 양념처럼 섞으면서도, 우정이 저 밑에 깔려있는 그런 말들과 마음이 툭툭 오고 가는 대화들.
나는 살짝 감동 먹고(!) 말았다. 친구와 술 한 잔 하며 나누는 대화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할 때 마음은 그래야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화’는 설교도 아니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호소하는 것도 아니고, 내 감상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내 맘대로 상대방을 움직이고자 화려한 언변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고, 대화 외의 다른 목적으로 자기 이미지를 프리젠테이션 하는 것도 아니다. 대화는 그냥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같이 앉아 있는’ 무엇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비어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친구가 말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고, 그의 영혼의 숨은 슬픔에 얼핏 다가갈 수도 있으리라.
요즘 청년들은 스펙을 쌓느라 하도 바빠서 우정이나 연애에 쏟을 시간조차 없어 보인다. 우리는 점점 더 눈앞의 친구가 아닌 스마트 폰과 대화하며, 친구와 직접 만나서 뜨거운 밥을 먹기보다는 연예인들의 ‘먹방’을 보면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지 않은가. 우리는 조금씩 타인과 진정으로 대화하는 법을 잃어가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잡다한 정보들과 진심을 담지 못하는 다변(多辯)과 SNS를 통한 의미 없는 수다에만 익숙해져 간다.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발음이 분명치 않은 A의 말을 그의 친구는 어떻게 알아듣는 것일까. 입 모양으로 또는 오랜 세월 지낸 친구여서? 또 그들의 대화는 왜 그리 구수한가. 이해할 수 있는 B의 말만 들어도, 일 이야기부터 연애 문제 고민까지 삶의 고단함을 위로해주면서도, 서로 좋아한다는 티도 안내고 구박하고 웃으며 경쾌한 리듬을 타는 대화의 흐름. 나는 고개를 돌려 진심으로 청년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내 사랑하는 학생들처럼 “에구, 이 멋진 녀석들~”이라고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다. B에게 A는 뇌병변을 가진 ‘장애인’ 친구가 아니었다. 툭툭 싸우고, 말로 구박하고, 함께 밥 먹는 그냥 ‘친구’.
뒷자리에 앉은 모르는 청년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이런 생각들에 빠져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내게, 내 진짜 친구는 “야! 너 밥 안 먹고 무슨 딴 생각 하냐!” 퉁을 준다.
에구. 쏘리. 쏘리. 소통한다는 것은 ‘나’를 비우고 내 눈앞의 ‘너’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라고 그리 부르짖고 다니는 내가 오늘 저녁은 모르는 청년들의 대화에 빠져 ‘너’를 깜박했네.
오늘, 우리들은 친구와 따뜻한 밥을 먹으며 소주 한 잔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