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민중항쟁이 끄집어낸 빛
발행: 2014. 05. 18.
'오월의 사회과학’(최정운) 참고·인용
“물론, 오늘밤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아마 죽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시민들의 그 뜨거운 저항을 완성시키고, 고귀한 희생들의 의미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이곳을 마지막까지 지켜야만 합니다. 저는, 끝까지 여기 남겠습니다.” -윤상원(5·18 용사)
끔찍한 사건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밝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빛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통일된 공동체의 일원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바탕으로 부정한 권력에 대항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나선 이유는 결국 각개 인간의 존엄성 문제와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여러분과 함께, 5·18민중항쟁과 당시 결성된 절대공동체, 그리고 해방광주의 상황을 바탕으로 민중이 일으킨 혁명 분위기와 그 결과에 대해 고찰해보려 합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가 종결되고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국민들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그에 따른 민주화에 대한 기대 또한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새로 집권한 신군부 세력은 독재에 대한 욕심으로써 이러한 국민들의 희망을 저버렸고, 1980년 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는 계속됐습니다. 결국 신군부는 5월 17일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에 이르죠. 계엄확대 소식을 들은 광주의 대학생 200여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이게 되는데, 이 때 행해진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은 시민들을 분노하게 합니다. 이어 광주 도심지로 옮긴 후 시민들 역시 동참하며 양상이 커진 항쟁 속에서, 공수부대가 행한 폭력은 ‘보여주기 위한’ 전시적 폭력이었습니다. 당하는 사람의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찌르고 자르고 패는 광경을 연출한 것입니다.
5·18 공수부대의 폭력은 흔히 거론되는 것처럼 우발적으로 야기된 결과가 아닙니다. 당시 광주교대 학생이었던 임영남 씨는 5월 18일 아침 길을 걷는 자신을 불러세운 군인이 “너 같은 학생 놈들 때문에 사흘을 굶었어. 너희들이 뭘 안다고 데모질이야. 너 같은 놈 몇 명을 죽여도 나는 죄가 되지 않아.”라고 말하며 단검을 빼 찌르려고 했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고된 군대 생활과 계급 원한에 대한 분풀이로써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러한 상황을 즐기며, 자신들의 증오심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들의 행위를 합리화시켜주는 정부의 ‘공산당 불순분자’ 담론은 오히려 그들의 죄의식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덕분에 마음대로 인간을 가지고 놀며 같은 부대 동료들과 가혹행위에 대해 경쟁을 벌이는 행위까지 자행할 수 있었습니다. 1990년 발간된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 따르면,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신고 있는 군화로 있는 힘을 다해 얼굴을 가격하는 것은 물론이요 며칠째 물을 마시지 못해 탈진 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즉석에서 배설한 자신의 오줌을 마시게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무대 헌병들의 경우 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모두 포복으로 화장실에 가서 혀 끝에 똥을 묻혀 선착순으로 돌아오게 하는 지시를 내리는 등 인격 모독적인 기합이 수없이 진행됐습니다.
광주 시민들의 투쟁 동기는 결코 민주주의라는 근대의 정치 이념이나 제도에 대한 요구로 귀착되지 않습니다. 계급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그 어떤 종류의 사람들마저 참여했던 5·18민중항쟁에서, 그들이 일어난 이유는 일단 감정적인 원인 때문이었습니다. 잔인하게 주변 사람들을 고문하며 인간의 존엄성마저 짓밟는 군인들에 대한 증오와, 불의한 광경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광주 시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그들은 그 공동체 속에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새로운 자아를 만나게 됩니다. 20일 오후 형성된 광주 시민들의 ‘절대공동체’ 안에는 계급도 없었고 차별도 없었습니다. 공수부대를 몰아내야 한다는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어떤 개인적인 상황도 제쳐놓고 오로지 ‘전체’의 일원으로써 저항을 해나갔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항쟁 동기를 ‘민주화 요구’로 귀결시킨 이유는 신군부가 전국에 퍼뜨리는 궤변으로 인해 점점 고립돼가고 있는 자신들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영·호남의 지역 감정에 따른 갈등으로 인한 사건, 공산당 불순 분자를 가려내기 위한 정의로운 사건, 정치적 음모를 바탕으로 한 사건 등 5·18을 총칭하는 신군부의 언어는 계속해서 그 양상이 달라졌지만 교묘하게 다른 지역 사람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은 5·18 이전의 민주화 요구 시위와 그들의 투쟁을 연결하고, 당시 사회의 지배적 정치 담론이었던 민주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투쟁의 정당성을 알려 존재를 드러내려 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의 분노가 결국은 사회적 혁명으로 변환된 것이죠. 주목해야 할 점은, 여타 외국의 혁명에서 보이는 ‘혁명 주도자’, 즉 리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시민 한 명 한 명이 주도자였고 절대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했습니다.
그러나 21일 오후 무장을 한 사람들과 민간인을 분리시킴으로써 최초로 광주의 ‘일반 시민’들은 투쟁에서 소외됐습니다. 또한 공수부대가 물러간 ‘해방광주’의 첫날인 22일에는 여러 군데에서 수습위원회가 구성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광주 시민들은 잊고 있었던 계급을 보았습니다. 살인 무기를 잡은 순간, 이 극단적인 상황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가정을 떠올렸고 지금 이 순간 결성된 절대공동체가 오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합리적 사고를 발현했을 때, 지금까지의 피의 값을 받기 위해 계속 투쟁을 해야 할지 아니면 앞으로의 희생을 막기 위해 굽혀야 할지에 대한 두 가지 안이 제시됐고 결국 해방광주의 시민들은 항쟁파와 수습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됐습니다. 모두가 가정으로 돌아가 원래 살던대로 경제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대로 물러서면 신군부의 궤변대로 광주가 ‘폭도’의 도시로 낙인 찍혀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저 물러나기도 어려웠겠죠.
광주 시민들은 그들의 생명을 지키는 동시에 모두의 명예를 지켜야 했습니다. 절대공동체에서와는 달리 공수부대가 일단 물러가고 난 해방광주에서의 항쟁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 문제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항쟁과 수습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했으며 대신에 제 3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희생된, 또 마지막 항전에서 희생될 사람들 대신 대다수 시민들의 삶을 얻고 그들이 죽음으로써 지켜낸 진실을 영원히 선포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5·18민중항쟁으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민중의 항쟁이 얼마나 많이 세상을 변화시켰는지 목격합니다. 그들이 죽음으로 지켜낸 진리는 ‘그 어떠한 폭력으로도 정치적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이는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의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또한 민주주의가 오히려 시민불복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거쳐 정립됐다는 것을 볼 때 진정한 민주주의는 특정 세력이 아닌 사회 전체의 의사소통을 거쳤을 때 비로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격렬하게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새나라의 공수부대’로써 등장한 5·18 민중들의 항쟁으로써 이뤄진 광주의 혁명적 분위기는 민중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뜨거운 예시입니다. 5·18민중항쟁에서 본 절대공동체라는 청사진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선, 1980년의 광주를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