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와 학생간의 신뢰관계
코너 [문화와 교육이 만났을 때]
한국 공교육의 장은 마치 순수한 초기 자본주의 사회와 같다. 교사는 학생의 노동을 바탕으로 높은 성적을 생산하고, 그 성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등급이 결정되어 대학시장으로 팔려나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두 계급은 급여를 매개로 한 생산관계를 맺듯이 한국 공교육의 교육자와 피교육자 두 계급은 높은 성적을 매개로 한 생산관계를 맺는다. 두 계급간 인간적 가치란 찾아볼 수 없다. 둘은 그저 계약을 맺은 ‘그렇고 그런 사이’일 뿐이다. 어느덧 한국 공교육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수업 이상의 교류를 상상하기가 힘든 일이 돼버렸다.
이 영화는 데브라지가 시·청각에 장애가 있는 아이인 미셀을 가르친다는 내용으로, 헬렌켈러 이야기와 유사한 골자다. 미셀은 시·청각 장애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을 배우지 못했다. 스푼을 내던진 채 손으로 음식물을 집어먹고 감정을 조절하다 못해 그대로 분출해 버린다. 이런 미셀을 얌전하고 성실한 학생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약물과 같은 특별한 의료적 조치나 체벌 같은 것이 아니었다. 미셀은 데브라지와의 일 대 일의 교육을 거쳐 정상적인 생활은 물론, 대학교육과정까지 거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데브라지의 교육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있다. 바로 교육자와 학습자 간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셀은 처음에는 데브라지를 신뢰하지 못하여 그의 교육을 거부하고 반항한다. 그러나 둘 만의 시간을 가지고 점차 신뢰를 쌓아간 후에 데브라지의 교육은 점차 빛을 발한다. 미셀은 단어를 인식하고, 그 단어가 지닌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사회생활을 영유하는데 필요한 여러 예절과 규범을 배웠다. 후에 미셀은 대학 교육 과정을 밟을 정도로 십여년에 걸친 데브라지와의 교육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다.
이처럼, 공교육의 장 안에서 교사와 학생은 계약관계에서 신뢰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계약관계보다는 신뢰관계에서 학습의 능률이 높아지고 학생의 정보흡수력이 향상된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릇 공교육의 교사라면 학생에게 단순한 정보만을 제공해 줄 것이 아니라 학생과의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정보 학생에게 그 이상의 것을 전달해 줘야 한다. 공교육의 교사가 학생과의 신뢰관계를 맺지 못하고 단순한 정보 전달의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한다면 공교육의 교사를 사교육의 ‘강사’와 구별할 이유가 없다. 교사와 학생 간에 신뢰가 없다면, ‘교사’와 ‘강사’ 둘 다 학생과의 계약관계를 바탕으로 높은 성적을 생산하여 판매하고자 하는 자본가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재 한국 대다수의 교육 현장에서 학생과 교사간의 신뢰관계를 찾아보기란 힘들 일이다. 공교육의 장에 교사는 없고 강사뿐이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따라 자본주의는 수차례 수정을 겪어 그 모순을 해소한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육도 ‘수정’을 통해 현재의 교사 학생 관계에 변화를 꾀해야 한다. 국가 공교육이 사교육과 다르고자 한다면, 무엇을 바꿔야 할지 생각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