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화’라는 해방의 두 얼굴

발행: 2014. 5. 6.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공저) 참고·인용

현대 사회는 ‘사랑의 홍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중 매체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귀에 사랑을 속삭이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짝을 찾아 헤매죠. 과거에 비해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여성 역시 적극적인 사랑의 과정에 참여하는 양상을 띠며 사랑의 형태는 가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자유로운 사랑의 과정을 통해 ‘개인화’라는 현대 사회의 흐름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져다준 것이며 사랑의 민주화 가 이뤄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전 세대들은 먼저 자유와 남녀 평등이 달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이전 세대의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유와 평등이 보장받고 있다고 여겨지는 지금도 사실 쉬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긴 어려우며 결혼까지 이어지긴 더 어렵다는 사실은 다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날이 갈수록 치솟는 이혼율이 보여주듯 이미 결혼을 한 부부도 진정한 사랑을 통해 만났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제가 계속 ‘진정한’ 사랑을 들먹이는 이유는 이 형용사가 일반적으로 ‘사랑’을 수식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단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며 그 때문에 사랑에 따르는 긴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희망을 사랑이라 생각하여 이를 삶의 중심에 놓는 사람들은, 개인화 사회 속에서 두 개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 사실상 고찰해보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위기가 왔을 때 더욱 막막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긴장들은 물론 단순히 각자의 실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결국 ‘개인화’라는 흐름에과 연관된 사회 구조에 따른 두 역할간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인간의 감정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사랑의 관계를 사회 문제로 확대시키는 것에 대해서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되는데요. 자세한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대기’란 단어에 대한 설명을 해볼까 합니다. ‘일대기’라는 사회적 용어는 현대사회가 ‘개인화’ 단계로 접어들게 되면서 새로이 정립된 개념입니다. 현대사회의 개인화는 남녀에게 주어졌던 고정된 성별 역할을 해제시킨 동시에 남녀 각각에게 ‘일대기’를 부여했습니다. 개인의 일대기들은 개방적인 개인의 결정에 따라 계속 달라지며, 각 개인에게 일종의 과제로 제시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의 틀입니다. 따라서 자유로운 두 개인이 만났을 때, 서로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개인의 일대기들은 충돌하게 됩니다. 결국 두 일대기 사이에는 간극이 생기며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노력해야만 메울 수 있겠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개인의 일대기는 오로지 능동적인 개인 그 자체의 의사로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산업화된 사회 구조는 개인의 일대기를 침범합니다. 노동 시장은 독립적인 개인을 선호하며, 그 이유는 당연히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시장 발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인이 특정 노동 시장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노동 시장이 요구하는 대로 자신의 일대기를 조정해야 하는 것이죠. 결국 개인은 노동 시장의 명령들을 포함해 자신의 일상 생활과 미래를 위한 계획을 통합한 일대기를 꾸려나가야 하는 과제를 해나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일대기의 구성은 자연히 남녀 각각의 일대기 사이에서 모순을 불러일으킵니다.
설령 각자의 일대기를 조화시켜 결혼의 단계까지 갔다 하더라도 남녀를 갈라놓는 여러 가지 쟁점과 갈등은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이를 개인적 측면이 아닌 사회적 이론의 측면으로 설명할 때, 이러한 갈등은 산업 사회의 사회적 토대라는 뿌리에서 형성된 것으로 파악해볼 수 있습니다. 외부 노동 시장에서 일하는 ‘임금 노동자’는 가사 일과 육아 등을 살뜰히 챙겨주는 ‘가사 노동자’가 있어야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산업적인 측면 저변에는 이를 보필하는 봉건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셈이죠. 따라서 남녀가 가정 내에서 실제로 평등해질수록 가족의 토대는 더욱 불안해지게 됩니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사적 전투들은 공적 지원(탁아, 유연한 노동 시간, 적절한 사회보장제도) 등을 통해 약화되며 이러한 지원들이 없을 시 갈등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측면은 차치하더라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로운 개인들은 결혼 이후에도 개인의 일대기를 끊임없이 형성해 나가려고 하나 결국은 안정된 가정으로 돌아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도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파트너와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교환을 추구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 역시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일대기의 방향은 서로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파트너에게 맞춰 나 자신의 결정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많은 경우 우리는 공유할 수 있는 기준을 찾지 못합니다. 서로가 파트너의 일대기에 대해 영향을 미치리라 믿고 있는 각자의 기대와 제약들만이 기준이 될 때, 사실상 그 둘의 일대기는 독립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으며 그 간극의 차를 메우기가 힘들게 됩니다.
결국 개인화라는 현대 사회의 해방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팀을 이뤄 특정 과업을 행하기 위한 과거의 결혼이 아닌,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결혼은 역설적으로 ‘자유’가 아닌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해져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일대기를 고려하여 선택을 해나가야 하는데 이 때 파트너와의 세세한 협상 과정 역시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개인화의 상황 속에서, 핵심은 ‘나 자신이 되는 것’과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함께 사는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에 있으며 그 누군가는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아를 모색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사랑의 관계에서 야기되는 사소하고도 끈질긴 갈등의 원인을 모색하여 대책을 마련해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지속적으로 함께 사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파트너가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면서도 함께 사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영원할 것만 같았던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떠나고, 개인의 일대기를 추구하고자 하는 일상성이 나타났을 때 사랑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만이 다시 외로워지는 것을 늦출 수 있는 가장 좋은 치유책 중 하나입니다. 개인에게 ‘일대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상대방을 자신의 일대기 속으로 끌어들인다면 결국 충돌한 서로 다른 두 일대기의 깨진 조각들만이 남을 뿐입니다. 즉, 가깝고도 먼 사랑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서로의 공간을 충분히 존중해주면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사랑의 낭만적·현실적 핵심입니다. 결국 사랑은 처음엔 민주주의인 것 같지만 결국 그 반대의 것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하며, 사랑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가져다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항상 위험에 처해 있는 이유는 ‘함께 함’이 지속되는 형태에 대해 각자의 주관적 감정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로써 개인의 독단성이 발현되기 때문입니다.
본 저서를 통해 우리는 추상적으로만 느껴지는 ‘사랑’과, 이에 수반되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육아 문제를 사회구조와 관해 심도있게 고찰해 볼 수 있습니다. 저서를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는 ‘자유’ 그리고 이에 따른 ‘부자유’입니다. 이전 세대와는 달리 ‘자유’롭게 사랑하고 결혼하며 아이계획을 짤 수 있는 현대이지만 이 모든 것에는 공고한 규칙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파트너와 함께 규정해야 하는 것이죠. 이에 따라 남녀 각각의 서로 다른 일대기가 충돌하며 이혼 등의 위기 상황이 발생하게 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일정 생각을 ‘부자유’스럽게 통제해야만 합니다. 현대는 이렇듯 자유와 통제의 메카니즘으로 구성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현대화’의 특성상 현대의 모든 측면이 두 얼굴을 띠고 있음을 발견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단편적’인 인간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사랑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원하는 상대방을 사랑할 자유가 주어지는 동시에 그에 따른 통제의 의무도 짊어져야 한다는 두 가지 측면을 미리 알고 있다면, 이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감정에 휩쓸려 한 연애‧결혼‧출산을 나중에 후회하고 이를 외면하고자 도피하는 사람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교원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