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람원

윤오영의 「소녀」에 나오는 소녀는 먼 친척 오라버니에게 적심을 보인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더랬다.
밀양아리랑에도 보면 ‘정든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하는, 부끄러워하는 아가씨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수줍음이라 해야 옳다. 볼이 붉어지고, 마음이 간질거리는, 봄처녀의 치맛자락같은.
그런가하면 윤동주 시인은 「별 헤는 밤」에서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라며 지식인으로서의 암울한 현실 앞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것도 부끄러움이라기보다는 책임감, 속죄 의식에 가깝다. ‘죽는 날까지/하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랄 만큼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 윤동주로서는 일제 강점이라는 현실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을 그 누구보다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한편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옛말을 보자. 이때의 부끄러움은 곧 수치심을 말한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에 대한 책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부끄럽다라는 동사의 기본의미를 ‘일을 잘 못하거나 양심에 거리끼어 볼 낯이 없거나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라고 풀이하였다. 내가 찾고 있는 부끄러움은 이런 것이다.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했으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면 분명 부끄러워해야 할텐데, 그런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이번에 국회에 입성하게 된 두 인물을 보면 아예 부끄러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추악한 성추행 파문이 있음에도 한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되고, 대학 교수라는 이의 논문은 표절 수준을 넘어서 아예 대필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 교수라는 직함 외에 국회의원이라는 금배지까지 더하게 된 판이다.
부끄러움의 실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벌써 두 달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MBC의 파업 사태를 보면 김재철 사장의 얼굴은 상당산성 돌벽보다도 두꺼운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최근에는 무용가 J씨와의 ‘부적절한’ 관계까지 폭로되었는데, 수차례에 걸친 제작비 지원과 너무도 뻔해 보이는 법인카드의 사용을 두고 그것을 연정이라 해야 하나, 문화에 대한 투자라 해야 하나, 대체 뭐라 해야 하나.
왜 항상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인가. 김형태 의원의 성추행 사건은 공중파 뉴스에서는 아예 제대로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포항시민들은 치욕과 분노에 가득차 있다.
정작 그는 새누리당이 차려준 출당이라는 밥상에 억지로 탈당이라는 숟가락만 들었을 뿐, 의원직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인물 검증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포항 시민들의 부끄러움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그런 전적을 가진 자가 어떻게 공천이 되고, 어떻게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나선 것일까. 10년 전의 일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도 된다는 것인가. 왜 김형태가 느껴야 할 부끄러움을 애꿎은 포항시민들이, 그리고 우리가 대신 짊어져야 하는가.
우리는 언젠가 아이들에게 윤동주를 가르치고, 그 시에 나타난 부끄러움의 미학을 말할 것이다. 양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도덕적 수치심에 대해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실종된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당당히 얼굴을 들고 아이들 앞에 설 수 있을지 치열한 고민을 해 보아야 한다. 왜 항상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이 되는가. 우리의 몫이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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