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당시 기독교 세력에게 쓴맛을 보여준 사나이가 있다. 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빼앗긴 이슬람의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그 뒤 중세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이동이자 ‘사자왕’이라 불리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참가한 제3차 십자군 원정까지, 기독교 세력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가 바로‘살라딘’이다. 이 이슬람의 영웅은 역설적이게도 이슬람 세계에서 천대 받고 있는 쿠르드족 출신이다. 우리에게 쿠르드족은 낯선 민족이다. 그들은 국제정치에서 부각되지 않아왔지만 오랜 기간동안 고난과 수난을 겪어 왔다. 쿠르드족은 인구가 2천 5백만 명을 웃도는 거대한 민족이며,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이슬람 제국에 합병되었고, 셀주크 투르크, 몽고 제국의 침략을 받았으며 16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쿠르드족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자 독립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1920년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이 맺은 ‘세브르 조약’에 서 쿠르드족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터키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케말 파샤’는 쿠르드족 억압 정책을 펼치며 이를 거부했다. 1923년 새로이 체결된‘로잔 조약’에서는 쿠르드족의 국가 수립 조항이 언급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그 뒤 중동은 서구 열강에 의해 국경선이 그어 졌고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인 쿠르디스탄은 세분화되어 여러 나라에 병합되었다. 그 뒤로 쿠르드족은 독자적인 국가 수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해왔으나 주변 국가들에 의해 좌절되어 왔다. 쿠르드족의 극적인 역사는 세브르 조약에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터키는 이를 반대하고 쿠르드족의 독립 운동을 탄압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터키 인구 8000만 명 중 약 1500만 명이 쿠르드족이기 때문이다. 즉, 쿠르드족이 터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터키의 쿠르드족 독립 운동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쿠르드족은 1978년 지도자 오잘란이 결성한‘쿠르드노동자당(PKK, Kurdistan Workers’Party)을 중심으로 터키에 대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희생자가 수만 명에 이르는 비극을 낳고 있다.
터키는 EU 가입에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이 걸림돌이 되자 독립 운동에 대한 탄압을 완화하긴 했다. 하지만 최근 유로존의 위기에 따라 터키가 EU 가입에 시큰둥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최근 다시 시작된 터키와 쿠르드족의 활발한 교전의 이유로 유로존의 위기를 꼽을 수도 있다. 이 같이 터키는 자국의 이익에 따라 쿠르드족을 쥐락펴락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여러 나라도 쿠르드족을 이용하여 자국의 이익을 얻거나, 그들을 핍박하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은 쿠르드족에게 무기를 제공하여 이라크 공격을 부탁했으며, 그 결과 이라크의 보복으로 수많은 쿠르드족이 학살당하였다.
미국은 걸프전 후 이라크 북부 지방에 쿠르드 족을 보호하는 명목으로 이라크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였다. 또다시 쿠르드족에게 독립 국가 건설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1992년 자치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친이라크계 쿠르드민주당(KDP, Kurdistan Democratic Party)와 친이란계인 쿠르드애국동맹(PUK, Patriotic Union of Kurdistan)사이에 세력싸움이 전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95년 터키에 근거지를 둔 PKK가 KDP를 공격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은 심화되고 쿠르드족 독립은 또다시 멀어져갔다. 과연 그들은 독립 국가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후세인 정권 제거에 큰 역할을 한 쿠르드족은 이라크 제2의 정치세력이 되었다. 또한 쿠르드족 출신인 ‘잘랄 탈라바니’가 이라크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현재 쿠르드족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총도 아니고 정치적 힘도 아니다. 바로 평화이다. 그들은 독립을 위해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러 지칠 대로 지쳐있다. 이제는 각국의 이해관계를 떠나 쿠르드족에게 평화로운 안식처를 제공해야 한다. 이슬람의 영웅을 배출한 민족, 그들에게는 이제 휴식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