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 2014. 3. 17.
영어캠프, 많은 학우들이 하고 싶어 하면서도 쉽게 할 수 없어 적잖이 궁금해 하는 아르바이트일거라 예상된다. 궁금증 해결을 위해 나의 영어캠프 체험기를 공유하려 한다. 겨울방학을 맞아 영어캠프 아르바이트에 도전했다. 5개 정도의 캠프에 지원했지만 연락이 없어서 포기하려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 캠프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6개의 수준별 반마다 원어민 교사 1명과 학생들의 소통을 도와주는 1명의 보조교사가 있는데 나는 보조교사를 맡게 되었다. 캠프는 아산에 있는 회사 연수원에서 2주간 묵으며 진행되고 2주가 지난 후에 참가자들은 한 주를 더할 것인지 정할 수 있었다. 페이가 2주에 70만원, 3주에 105만원으로 꽤 괜찮다고 생각했고 방학동안 딱히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냉큼 가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2014년 1월 1일 나의 영어캠프 생활이 시작됐다. 정초부터 일하러 떠나려니 서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아이들도 정초부터 캠프에 왔냐고? 그건 아니었다. 다음날부터 시작될 캠프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온 것이었다. 연수원에 도착하니 캠프 총책임자인 원장님과 그를 도와줄 매니저 3명 그리고 나 같은 보조교사 5명이 있었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앞으로 할 일 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스케줄이 있어서 정말 식겁했다. 심지어 주말 에도 풀스케줄이었다. 노예계약 한 것을 깨달으 며 숙소로 가서 짐을 풀었는데 시설은 정말 좋았다. 크기도 마치 8인실 같은 4인실이었다. 산 속에 있어 전화가 잘 안터지고 무선인터넷 사용에도 어려움이 많았으나 숙소동을 빠져나와 교육동으로 가면 인터넷이 잘 터져서 큰 불편은 없었다. 그 날 우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캠프머니'를 만든 것이다. 시장놀이 할 때 쓰이는 화폐이고 이걸로 아이들에게 동기부여를 한다고 했다. 그 다음 교재를 만들었는데 여권이나 비행기 티켓 등을 만드는 일이었다. 물론 기본 교재로 텍스트북이 따로 있다. 다음으로 아이들을 환영해 주기 위해서 건물을 풍선으로 장식하고 곳곳에 만국기를 걸었다. 우리가 끙끙대며 일하고 있던 저녁, 원어민들이 뒤늦게 도착했다. 우리보다 일당도 많이 받는데 육체적 노동에서도 제외되다니 뭔가 얄미웠다.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둘러앉아 자장면을 먹었다. 외국인들인데도 한국의 중금음식 문화에 익숙한 듯 먹길래 재미있었다. 그런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약간 소양이 부족해보이는 원어민이 있었다. 원장님이 그 날로 해고하고 다음 날 새로운 원어민을 데려왔 다. 그걸 보고 요즘은 원어민이 더 이상 벼슬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이윽고 담임할 반이 공지됐는데 나는 레벨4 아이들을 맡게 되었고 같이할 원어민은 닉 펠버라는 미국인이었다. 한국에 온 지 3년째고 부산사투리를 구사하는 흥미로운 남자였다. 다음날 아이들이 속속 도착하기에 면면을 하나하나 관찰했는데 나이대가 매우 다양했다. 알고보니 초 1부터 중3까지 받았다고 한다. 존재만으로도 귀여운 아이들이 있는 반면 솜털이 털이 돼가는 시커먼 남자애들도 꽤 있었다. 이 아이들이 섞여서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면서 곧 있을 레벨테스트를 거쳐 나의 반으로 들어올 아이들은 누구일까 기대도 됐다. 레벨테스트 결과가 나고 레벨4 아이들이 정해졌을 때 말 안들을 것 같은 아이가 없어보여서 좋았다. 첫 수업을 하는데 애들이 수업 내내 선생님이라는 작자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만 줄창 해대니 따분하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못 알아들어도 영어를 계속 듣고 있으면 말문이 트일거란 희망적인 생각에 웬만한건 번역을 안해주고 나도 영어를 써서 애들을 지도했다. 아예 못 알아 듣지는 않아 보여서 레벨 4 수준 있구나 하고 뿌듯했는데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선생님은 한국말 써주시면 안돼요?”라는 어떤 학생의 부탁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뒤로는 제대로 통역해주고 한국말로 지도하기 시작했지만 뭔가 섭섭했다. 오전 텍스트북 수업이 끝나고 애들이랑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밥이... 엄청 맛있었다. 고생해서 살빠진 상태로 퇴소할 줄 알았는데 밥이 맛있는 바람에 오히려 살쪄서 왔다는 후문. 밥 먹고 오후 일정은 change class라고 해서 원어민들이 로테이션하면서 하는 수업이고 그 다음시간은 상황극을 하면서 영어를 배우는 시간이다. 레스토랑, 런닝맨, 올림픽, 시장, 공항 등 확실히 애들이 재미있어할만한 건 다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준비 하느라 우리들이 정말 고생이 많았다. 오후 일정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캠프 마지막 날 있는 말하기 대회와 노래 대회를 준비하기위해 말하기 연습, 팝송 연습이 있고 영어일기와 자습시간을 마지막으로 해서 9시 반에 아이들의 일정이 끝난다. 애들한테 너무 과한 것 아닌가 해서 자습 감독 하는 중간중간 애들한테 힘들지 않냐고 떠보곤 했었다. 아이들이 캠프를 한 주 더 하게 되면 보조교사들이 남아서 더 근무해야하는데 아무도 3주까지 하기 싫어했기 때문에 펼친 일종의 물밑작업이기도 했다. 그렇게 물어보면 아이들은 응당 앓는 소리를 내면서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힘들다고 보챈다. 그런데 “자습끝” 소리가 들리자마자 시들어 있던 아이들이 치타처럼 튀어나간다. ‘너희 정말 힘들었니?’ 하는 생각만 들었다. 공식일정이 끝나면 우리는 수업일지를 써서 원장님께 제출하고 회의를 했다. 근데 원장님이 말씀을 너무 길게 하셔서 11시까지 이어지는게 다반사였다. 캠프 일 중에 그게 제일 고역이었던 것 같다. 회의까지 끝마치면 다들 녹초가 되어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씻고 잘 준비를 끝마치고 자리에 누우면 하루동안 있었던 아이들 의 에피소드를 공유하며 폭풍수다를 떨다가 골아떨어졌다. 바닥이 뜨끈해서 등따시고 아주 잘 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2주동안 동료들이랑 아이들이랑 같이 웃고 울고 하면서 많이 정들었던 것 같다. 모두 지금까지 연락한다. 닉 선생 님 까지도! 주말에 쉴 시간도 없고 적은 보수에 일도 고되니까 위에서 지시하는 원장님도 악덕 업주같이 느껴지고 서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어 캠프가 끝난 당일에는 같이 일했던 사람 모두(원어민 포함) 다시는 영어캠프 아르바이트 안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와서는 좋은 기억만 남아서 그런가 아이들도 또 보고싶고 동료들도 보고싶고 원어민들까지도 다시 만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아마 이번 여름방학이 오면 또 영어캠프 알바를 할 것 같다. 대신 조건이 더 좋은 업장에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