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과 글에 허구가 있는 것을 보려면 내 안의 중심에 내 것, 즉 나만의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사는 내 인생을 남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가 사는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의 양심≫은 말의 진정성과 행동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절판되어 해당 책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지리교육과 김영래 교수와 함께 ≪말의 양심≫을 읽으며 우리들의 ‘말의 양심’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Q1. 교수님께서 학부생 시절 감명 깊게 읽으셨던 책은 무엇이며, 어떤 내용인가요?
세상에 대한 인생 가치관에 영향을 주고,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꾸는 데 영향을 준 책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7년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시대였습니다. 정부에 의해 많은 자료가 왜곡되고 언론과 통계가 조작되던 시절이었죠. 그때 우연히 서점에서 읽게 된 엘리아스 카네티(이하 카네티)의 ≪말의 양심≫은 많은 사회과학 서적들에서 비판했던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과 왜곡된 자료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였습니다. 이 책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즉 1920~1970년대 유럽의 상황에 기반한 에세이 모음집이라서 1980년대 그리고 현재의 대한민국의 상황과는 현실적 괴리감이 있지만, 말과 글이 주는 힘과 허구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는 점에서는 시대를 초월한 울림이 있습니다. 가령 제5공화국이 내세운 ‘정의사회구현’이라는 슬로건은 가장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 내세운 선언이었으며, 가장 양심이 없는 말이라는 것을 ≪말의 양심≫을 읽고 나서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말에 진정성이 없으면, 아무리 정의를 많이 외쳐도 정의의 양은 증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해석한 ‘말의 양심’이란 ‘말에는 말하는 이의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행동이 보이면 그게 말입니다. 진정성이 있으면 말과 행동이 같아집니다.
Q2. 교수님께서는 그 책을 언제,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되셨나요?
인터넷 개념도 없던 1980년대에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책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의 시대 상황과 사회, 교육 현실을 알고자 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으레 들르던 서점에서 무심코 손이 가서 짚었던 책이 ≪말의 양심≫이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읽다 보니 1시간이 지났을 정도였으니 말이죠. 말의 양심. 그 자체로 압도적 끌림이 있지 않나요(웃음)?
Q3. 이 책을 선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1980년대는 정부에 의해 언론과 국민의 의견이 통제를 받아 개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막혀있던 시대였습니다. 반면, 개인적으로 2020년대의 현재는 ▲학원 ▲개인주의적 문화 ▲유튜브 등 사회적 요인의 영향으로 우리 스스로 자신의 주관을 가둬버린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리적 감옥보다 더 빠져나오기 힘든 감옥이 고정관념과 타인의 생각에 갇힌 감옥입니다. 저의 또 다른 편견이자 고정관념일 수 있지만, 지금의 20대는 자기 생각보다는 타인의 행동이나 생각, 관점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타인의 생각이나 말의 허실을 파악할 수 있다면, 타인의 생각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만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40여 년의 시간 차이는 있지만, 이 땅의 청년들이 자기 생각과 꿈을 세상에 드러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말의 양심’이란 진정성 있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진정성 있게 하다 보면, 상대의 말과 행동이 거짓인지, 진정성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 스스로가 진짜배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해당 책을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Q4. 이 책이 교수님께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인생의 가치관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제가 대학 새내기였던 1987년에는 6월 항쟁이 일어났고, 이를 기폭제로 그해 소위 ‘전대협’이 발족되는 등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대학생들의 열망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어 우리학교에 입학했고,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관련 책 자체가 거의 없었던 때라서, 교사로서 우리 교육을 어떻게 대하고 학생들에게 어떤 교육을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조차 잡지 못해 답답해했었습니다. 이때 접한 책이 ≪말의 양심≫이었죠. ‘눈에 보이는 현상과 글이 허구일 수 있고,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조작일 수 있다’라는 카네티의 말들은 정부에 의해 조작된 자료와 언론을 기반으로 형성된 20여 년의 내 삶을 부정해야 하는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이때부터 찐 보수주의자에서 진보적 성향으로 가치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권력과 군중, 말과 글의 허구와 진정성에 대해 쏟아내는 카네티의 거침없는 비판들은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우리나라 현대사 및 사회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왜 학교 교육이 사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교육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모여 토론해 보자는 의도로 지리교육과 내에 ‘BC’라는 교육분과를 만들었습니다. 이 모임은 현재도 지리교육과 3대 분과로 남아있습니다. BC는 A 그룹이 아닌 BC 그룹을 위한다는 뜻과 시시비비(是是非非)에서 시비(是非)의 순서를 바꾸어 ‘잘못된 것을 옳게 바꾼다(非是)’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저의 가치는 교육분과 활동을 통해 추상이 아니라 구체화되었기에 대학 4학년 때인 1990년 10월 8일 제1회 교사 임용시험 실시가 발표되었을 때 이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범대에 왔을 때는 잘 가르치기 위한 방법을 배우고자 온 것인데, 임용고시는 교사가 되기 위한 수단 과정으로 전락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졸업도 거부하고 5학년까지 다녔습니다. 동기들이 졸업하던 91년 2월의 졸업식 날, 그토록 바랐던 교사가 될 수 없는 현실에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눈물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대학 3~5학년 동안의 제 학창 시절은 현재의 나를 만든 중요한 실천적 토대였으며, 그 시작은 ≪말의 양심≫이었습니다.
Q5. 이 책이 교수님께 영향을 준 부분이 더 있나요?
20대 이후의 학문적 삶의 자세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양의 글에 ≪말의 양심≫이 있다면, 동양의 글에는 ‘신독(愼獨)’이 있습니다. 중용(中庸)에 나오는 신독(愼獨)은 혼자 있을 때라도 무엇이든 허투루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성리학의 사서(四書) 중에서 가장 와닿는 말이며, 제 삶의 신조이기도 합니다. 이 두 말은 하루 4시간씩 자며 버틴 석박사 8년 6개월의 대학원 생활과 먹고 살기 힘들었던 13년간의 시간강사 시절을 견디며 매년 논문 한 편이라도 쓸 수 있었던 내면의 버팀목이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지금 교수로서의 연구와 강의의 근본적 토대를 이룹니다. 모든 강의의 첫 시간에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교수자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학문적 갑질이다’, 교수가 학문적 전문성이 부족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져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단순히 책만 읽어주는 수준의 강의를 하는 것은 말(지식)의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신독(愼獨)’과 ‘말의 양심’이 제게 해 준 울림은 ‘내면 가장 밑바닥에 있는 내 양심에도 자존감을 가져라’입니다. 즉, ‘신독’은 나 자신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고, ≪말의 양심≫은 세상에 관한 통찰력을 준 것이죠.
Q6.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또는 기억에 남는 구절이나 부분이 있으시다면 소개해 주세요.
≪말의 양심≫, 그 자체로 압도적이지 않습니까. 제가 이 책에서 얻은 것은 그 안에 쓰여 있는 멋진 문장 몇 개가 아니라 ≪말의 양심≫이라는 제목 그 자체와 그 안에 담겨 있는 카네티의 날카로운 통찰력입니다. 명언이나 저자가 한 말의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말의 양심≫에서의 문장을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Q7. 마지막으로 책과 관련하여 20대를 살아가는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내 인생의 편집권을 잃지 마라. 세상 그 누구도 내 삶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 오로지 자신만이 수정할 수 있다. 대신 그 선택에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선택이 잘못되었을 때 주변 환경과 남 탓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존감이다’
예전에 교양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에게 발송했던 메일의 첫 마디입니다. 해당 메일의 내용은 제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개인적 사건으로 저는 고교 시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여파로 대학에 입학하고 약 1년간의 방황이 이어졌습니다. 그 방황을 끝내준 것이 카네티의 ≪말의 양심≫이었죠. 남의 말과 글에 허구가 있는 것을 보려면 내 안의 중심에 내 것, 즉 나만의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몸뚱어리와 머리는 내 것인데, 그 안에 있는 생각은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뒤섞여 있었으며,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것을 찾고, 만들려고 몸부림치며 대학 1, 2학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학 3학년 때쯤, 과거의 내 방황도 결국은 내가 선택한 것이며, 내 안에 나만의 중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름 잘 나갔던 고교 시절이라는 과거에 집착하면서 방황이라는 행동으로 가시화되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 인생을 남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가 사는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진정성이 있으면, 상대의 그럴듯한 말과 추켜세움이 진짜인지 가식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 나만의 세계가 갖추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학교에 다니는 모교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평생의 자리(교사)는 학교 안에 있을지언정, 삶까지 그 안에 가두지는 마라’, 학교라는 보수적 체계 안에 갇히는 순간, 여러분은 몇 년 안 되어 매너리즘에 빠지고 젊은 꼰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육공무원인 교사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선생님이 되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키워보니 느끼는 게 하나 있습니다. 아이는 놀아 주는 것인지 함께 노는 것인지 정확하게 압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함께 놀지 못한 한 아빠의 후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