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김상아(영어교육·25)
나는 자신감이 없는 교사이다. 항상 동료 교사들보다 뒤처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동료들의 수업, 학급 활동, 상담 기법 등을 염탐하고 따라 하기 일쑤다. 왠지 모르게 나보다 동료 선생님을 더 반가워하는 듯한 학생들의 리액션을 목격할 때면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부러움을 느끼며 한없이 작아진다. 이렇게 열등감 덩어리인 나지만, 그래도 나름 내세우고 싶은 사실이 있다. 나는 이름하여 ‘장학금 헌터’다. 교직 경력 8년 동안 총 네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안겨주었는데, 총금액으로 따지면 1억 원 가까이다.
S군이 첫 번째 타자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매가 매서운 S군은 태권도 선수로 활동하며 대회 전 무자비한 체중 감량으로 늘 나를 안타깝게 하였다. 복지 담당 선생님의 안내를 통해 S군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복권기금꿈사다리장학금’ 공문이 눈에 들어왔다. 차상위계층,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등 법정 저소득층에 해당하는 학생만 지원할 수 있었는데, 혜택이 놀라웠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졸업 시까지 매달 15만 원~45만 원씩 지원되고, 총액으로 따지면 최대 4천5백만 원 수준이었다. ‘이 장학금은 꼭 타고야 만다’라는 의지가 강렬하게 솟구쳤다. 내가 받을 돈이 아닌데도, S 군 본인보다 내가 더 설레발쳤다. 학생과 몇 날 며칠 씨름하며 같이 자기소개서를 쓰고, 자기소개 영상을 촬영하고 또 편집했다. 결과는 합격! 수화기 너머로 기쁨의 소리를 지르시던 학부모님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복권기금꿈사다리장학금’은 지속적인 멘토링을 장려하여 S 군과 나는 5년째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왜소한 체격에 안쓰러움을 자아냈던 소년이, 점점 늠름한 청년으로 변했다. 학업을 원체 소홀히 하여 매일 잔소리를 부르던 아이였는데, 명절에 안부 문자도 보낼 줄 아는 고3이 되었다.
‘선생님, 저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전국 대회 입상했어요. 선생님 덕분인 것 같아요.’
최근에는 위와 같은 문자도 받았다. 기쁜 소식을 나눠주는 모습이 참 고맙고, 대견하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정말 S 군의 말처럼 나의 공도 있는 것 같아 자랑스러웠다.
S 군과 성공을 경험한 후 나는 매년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발견하면 꼭 장학금에 지원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상담하다 보면 참 딱한 학생들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님이 홀로 키웠는데, 코로나 사태 및 아버님의 부상으로 수입이 급감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W 군이 있었다. 오 남매 중 셋째로 지내며 턱없이 부족한 지원 속에서도 구김살 없이 오히려 풍족한 마음씨를 지닌 S 양도 있었다. 졸업식에서 처음으로 만난 학부모님이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 찰나의 순간, 깊은 진심이 느껴져 마음을 울렸다.
사실 내가 장학금 헌터가 된 사연이 있다. 나 역시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여러 비영리 단체를 알아보고 지원서를 제출했는데, 경쟁은 꽤나 치열했다. 여러 장학금에 지원했지만 계속 낙방하기 일쑤였다. 얼굴도 모르는 교수님들께 찾아가서 추천서를 부탁할 때의 참담한 심정을 잊을 수가 없다. 한 번은 인품 좋기로 소문난 다른 학과 교수님께 다짜고짜 찾아가 추천서를 부탁드리기도 하였다. 내 손을 꼭 잡으며 ‘이런 일은 얼마든지 부탁하라’던 그분의 따뜻함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나는 결국 좋은 장학금에 선정되어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전혀 부끄러울 일이 아닌데, 그때는 왜 그토록 낯 뜨거웠는지 모른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내 학생들은 나처럼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려움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야무지고 단단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약자를 위해 제공되는 여러 제도와 혜택들을 똑똑하게 이용하며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대학생 때 받았던, 그리고 지금 되갚고자 하는 ‘따뜻함’을 기억하며 사회에 환원하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