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이현지(영어교육·24)

오이가 주렁주렁 열린 넝쿨이 기어오르는 철조망 건너편에는 장미 넝쿨이 담 너머까지 늘어져있고, 큼직큼직한 수세미가 잔뜩 달린 원형 문을 지나면 도라지꽃과 민들레, 국화가 저마다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는 정원에 도착한다. 포도 넝쿨과 등나무가 어우러진 정자에 앉아 내려다보면, 쑥갓이며 겨자채, 고수가 저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잎새 뒤에 붙어있는 처음 보는 벌레들, 호박 겉에 붙은 민달팽이들, 먹이를 찾는 사마귀 한 마리, 아직 싹을 틔우지 않은 씨를 파먹는 까치까지. 학교 텃밭에는 늘 다양한 구경거리와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학교 텃밭은 1층 중앙 정원 구석 어딘가나, 학교 뒤편 으슥한 곳에 숨겨진 장소가 아니었다. 동관 3층 복도를 지나 출구로 나가면, 학생식당 옥상의 넓은 공간을 흙으로 메운 공중정원이 나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시야에 빌딩 숲 대신 장대한 산이 함께 펼쳐진다. 지금은 은퇴하신 교장선생님께서 국화를 가꾸는 것을 특히 좋아하셔서 만드신 공간이라고 했다. 많이 낡았지만, 학생들이 쉬어갈 수 있는 정자 및 벤치와 촘촘히 이어지는 나무 길, 그 옆으로 몇 평이나 되는 텃밭에, 한쪽 구석에는 거대한 비료 더미까지 있었다.

딱 봐도 관리하기에 일손이 많이 필요할 같은 이 공간을 가꾸는 것은 생활지도부 일원들이었다. 체육교사이신 생활지도부장님께서는 어릴 적 농사일을 많이 해보셨다 하시며 텃밭 흙을 금세 전부 뒤집고는 능숙하게 이랑을 만드셨다. 생활지도부 주도로 생태교육 교사동아리를 꾸려, 다 함께 흙을 잔뜩 뒤집어쓰며 오이, 호박, 상추, 봉선화, 쑥갓, 토마토, 방풍나물, 바질, , 당근 등 다양한 작물을 심고 수확하였다. 아침저녁, ·여름·가을,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일원 중 누군가가 나가서 틈틈이 작물에 물을 주고 밭을 돌보았다.

생활지도부 텃밭에는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방과후 노작교육 겸 벌점상쇄프로그램으로, 벌점을 많이 받은 학생들이 텃밭에서 땀을 흘리며 풀을 뽑았다. 벌점상쇄프로그램 담당 교사였던 나도,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한 시간 동안 함께 풀을 뽑았다. 어떤 학생은 벌레에 기겁하고, 어떤 학생은 풀 뽑기를 너무나 즐거워했다. 점심시간에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텃밭을 돌아다니고, 정자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예전에 정자에서 담배를 피우는 겁 없는 학생들도 있었다곤 하지만, 텃밭을 돌보러 수시로 선생님들이 드나들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방과후에 작물을 수확하고 있으면, 이름 모를 학생이 옆에 와서 같이 쭈그려 앉아 수다를 떨며 일손을 보탰다. 함께 수확한 고춧잎과 고추를 들고 집에 돌아가는 학생의 얼굴이 굉장히 밝았다.

우리 학급은 밭 바로 옆쪽 복도에 있었다. 자연스레 밭 관리 담당이 되었던 우리 반은, 밭을 정말 사랑했다. 볕이 좋은 날에는 밭에 나가 반 아이들과 함께 새로 작물을 심거나 정자에서 수다를 떨었다. 자신이 심은 씨앗이 언제 싹을 틔우나 궁금해서 매일 나와보는 아이도 있었다. 교무실이나 학급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텃밭 정자 아래서 하면 어쩐지 좀 더 가볍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꾸짖는 것처럼 생각했을 훈계도 어려운 집안 사정 이야기도, 푸릇푸릇한 식물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이야기하다 보면, 텃밭을 나갈 즈음에는 표정도 마음도 한결 밝아져 있었다.

텃밭은 모두가 학교에서 가장 사랑했던 공간이었지만,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의 시선은 달랐다. 낡고 오래된 정자가 학생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면서 어느 날 텃밭이 폐쇄되고, 그해 정원의 흙을 모두 덜어내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다시 열린 정원에는 깔끔한 새 벤치와 테이블이, 콘크리트 보도블록이 깔렸다. 아무렇게나 자라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던 장미 넝쿨도 전부 사라지고, 작달막한 장미 몇 송이가 조금 심겨있었다. 텃밭 공간은 사라지고, 학생들은 식물을 심은 공간에는 들어가지 못 하게 바뀌었다. 훨씬 깔끔하고 예뻐진 정원이 되었지만, 정원을 찾는 사람들의 수는 확실히 줄어있었다. 학생이며 선생님들이 편하게 모여 얘기하고 일하던, 멍하니 자연을 바라보며 힐링하던 그때 그 공간, 이름 모를 잡초가 꽃을 피우고 각종 곤충이 모여들던 그곳이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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