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선(환경교육·23) 학우
나는 매트릭스 시리즈를 초등학생 때 처음 보았다. 우리 가족은 ‘온 가족이 함께 보는 영화 시간’을 가끔 가지곤 했는데, 그때 아버지의 추천작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나를 세상의 주인공으로 여겼는데, 내가 노력해서 못할 일은 (거의) 없다고 믿었다. 그런 나에게 ‘매트릭스를 나간다는 네오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고, 사이퍼의 배신은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감히 ‘매트릭스를 나간다.’는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매트릭스는 무엇인가. 통제다. 매트릭스는 컴퓨터가 만들어낸 꿈의 세계. 그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통제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인간을 바로 이것(배터리)으로 만들기 위해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매트릭스는 ‘통제’라고 했다. 우리가 ‘노예’라는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라고. 그 누구도 노예로서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파란 약을 먹고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 중요한 맹점이 있다. 매트릭스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노예’라는 사실을 모른다. 매트릭스 속에서 우리는 ‘통제를 벗어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매트릭스 속에서 자신이 매트릭스 속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매트릭스가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된다.
나는 온전한 자유의지로 행동하는가? 아니면 나를 통제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는 자유로운 것만 같다. 나는 내 의지대로 손을 움직여 타이핑을 치고 있다. 내가 원하면 물병을 열어 물을 마실 수 있다. 원한다면 이 글을 대충 마무리하고 늘어지게 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내 의지’는 통제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 자유의지 자체가 이미 매트릭스 안에서 프로그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절대 자유롭지 않다. 과제의 폭풍 속에서 그냥 다 내던져버리고 싶을 때라던가, 아침 강의에 가기 싫은 날도 어찌저찌 일어나 뛰어나간다든가 하는 어느 정도의 이성의 끈을 절대 놓지 않고 살아간다. 당장 앞에 놓인 쾌락을 억제한다. 우리는 왜 그 끈을 놓지 못할까. 그것은 우리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남들의 인정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왜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까?
나는 그 이유를 ‘사회’라는 매트릭스에서 찾았다. “사회는 우리를 통제한다!”와 같이 직접적으로 말해 버리면, ‘군부 정치 때도 아니고 지금 이게 무슨 말?’과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매트릭스 속이다. 아무도 실제로 통제를 느끼지 못한다.
한 꺼풀 까서 들어가 보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이유. 그것은 사회가 ‘인정받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세뇌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부터 우리는 계속 평가받고, 등수를 매긴다. 그리고 높은 등수의 친구는 칭찬받는다. 미디어에는 예쁘고 학벌 좋은 사람들이 우상시된다. 계속해서 줄 세우기 경쟁이 일어나는 사회 속에서, 나는 인정받기 위해 욕구를 통제하며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친 몸을 이끌고 하루의 스케줄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바로 앞에 놓인 쾌락을 맘껏 향유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사람을 사회가 실패자로 낙인찍기 때문이다.
자, 이제 나는 내가 매트릭스 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 사람이다. 나는 실제로 네오의 입장인 것이다. 나는 돌연 ‘자연인’ 선언을 하며 모든 통제를 끊어 낼 수도 있다. 당장 내일부터 수업에 가지 않으면서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만사에 초연해질 수도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들은 사회에 통제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내일도 스스로 그 통제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가끔 반발심이 생겨서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더라도, 다시금 마음을 잡고 얌전히 매트릭스에 순응할 것이다. 나는 사이퍼와 같은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나는 통제받기를 선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