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지 동도중학교 교사
2013년 교사로서 첫 발령을 받고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의 담임이 되었다. 39명의 사춘기 소녀들이라······. 각자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듯 아이들은 다양한 고민과 생각을 하며 다양한 사건들을 만들었다. 작게는 화장과 교복 문제로부터 더 나아가 수업 태도, 교우관계, 이성 문제, 학교폭력 등 여러 가지 일들로 담임인 나와 대치 상황을 이루게 되었다. 초짜 담임인 나에게 무슨 뛰어난 기술이 있었으랴. 교무실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은 일상다반사였고, 종례를 마치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을 적막과 잔소리로 채우기도 하고, 부모님께 연락한다며 습관성 협박을 하기도 했다. 매일 같이 닦달과 잔소리를 들으며 나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하느라 바빴던 그 아이들은 졸업 후 나의 결혼식에서 멋진 축가를 불러주었다.
왜 그랬을까? 나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왜 그 아이들은 나에게 ‘축복의 노래’인 축가를 불러주었을까? 사실은 그 아이들이 좋았다. 무섭게 지도를 하고 나서 혹시 그 아이가 행동에 대한 반성이 아닌 마음의 상처를 받은 건 아닐까 신경이 쓰였다. 아이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고 행동의 원인이, 눈물의 이유가 궁금했다. 아직도 그 아이들의 반 번호와 이름과 얼굴을 매칭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많이 주었던 아이들이었다. 그 마음을 그들도 느꼈을 것이다. 함께 웃음소리를 나누고 서로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마주하고 체육대회를 준비하며 함께 땀 냄새를 맡았던 그 시간이 따뜻했다. 서로에게서 온기를 느꼈다.
지금의 나는 담임으로서 학생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 물론 흘러간 10여 년 속에 많은 변인들이 존재하겠지만 지금의 나, 요즘의 아이들, 그리고 우리가 소통하는 방식은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아이들은 학교 일과가 끝나면 소위 ‘칼종례’를 원하고 교사는 ‘칼퇴근’을 원한다. 서로의 번호를 공유하지 않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를 꺼린다.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을 사이에 그어두고 혹시 넘어올라, 책잡힐라 경계하고 몸을 사린다. 이러한 교직 생활에서의 분위기 변화는 나에게 편리함과 동시에 그리움을 가져다주었다.
이 현상이 비단 점점 진해지는 사회의 개인주의 성향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학교, 교사, 학생, 학부모를 아우르는 따뜻한 하나의 울타리 대신, 그들 사이에 점점 더 두꺼운 얼음벽이 생기고 있는 것만 같다. 특히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코로나 사태, 교권침해, 아동학대 등의 이슈들이 불거지면서 교육 당사자들의 태도가 더욱 냉철해지는 듯하다. 나 또한 학생들에게 적당히 선을 긋고, 적당히 들어주며, 적절한 평가를 하고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며 지내고 있다. 교직에서의 나의 태도는 적당하고 적절할지는 몰라도 그 온도가 예전만큼 따뜻하지는 않다.
생각해 보면 어떠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따뜻함 한 스푼이 아닐까 싶다. 겨울철 살을 에는 추위에 벌벌 떨다가도 내 앞의 작은 난로 하나면 미소 지어지는 것처럼, 교육의 현실에서도 우리가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따뜻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교육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보이는 노력과 믿음, 그리고 인정에서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약간의 따뜻함만 품고 있다면 나아가는 과정 중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좌절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냉철한 현실 속에서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은 그 작은 따뜻함 속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