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희문을 방문한 관광객이 광희문을 촬영하고 있다.

  서울 중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 3번 출구로 나가면 4소문(小門)중 하나인 광희문을 볼 수 있다. 서울 4대문(大門)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4소문에 대해서는 다소 생소할 것이다. 4소문은 4대문과 같이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했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광희문에는 죽음과 관련된 역사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은 “능역은 한양성곽 사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고 규정 했다.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주로 광희문을 통해 상여 등을 이동시켰다. 대부분의 영구차의 이동이 이곳을 통해 해결됐으니 생과 사의 흐름을 쫓는 당시의 경향도 광희문 주변지대의 삶을 이룩시키는 주요한 작용으로 자리 잡았다.
  또 광희문에는 죽음과 관련된 슬픈 역사가 담겨 있다. 1907년 8월 1일 일제가 강제로 군대를 해산하자 이에 불복한 2개대대 병사 1,200명이 숭례문, 서소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약 120명의 병사가 전사했는데, 시체들을 광희문 밖에다 운반하여 늘여놓고 가족에게 시체를 찾아가도록 공고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광희문이 지난달 17일, 39년 만에 철책이 제거된 후 민간에 개방됐다. 광희문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문루가 철거되고 도로 개설로 인해 성벽 일부가 훼손되는 등 오랫동안 방치돼 오다 1963년 서울 성곽이 사적 제10호로 등록되면서 1975년 문루와 주변 정비 공사가 시작됐다. 39년 동안 철책으로 통행을 막아놨다가 개방을 한 이유에 대해 공원녹지과 이오수 담당자는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폐쇄적으로 관리했지만, 문화관광사업에 의해 우리 문화를 알리고자 개방하게 됐다”고 밝혔다.
  광희문을 보면 성벽이 이어지다가 끊긴 느낌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광희문 복원 과정에서 광희문의 성벽에 이어진 느낌을 주려고 했지만, 문화재 시굴조사에서 과거 광희문을 지은 기초 흔적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문화재 관리에 관해서는 “광희문 곳곳에 CCTV를 설치해 관리실에서 광희문 사방을 볼 수 있다. 24시간 개방인 만큼 그에 맞춰 관리하고 있다”며 보호에 힘쓴다고 덧붙였다.
  개방 후 매주 토요일 오후2시~4시에 문화유산 탐방 프로그램을 열어 광희문 및 서울 한양도성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서울 중구 문화관광코너 에서 신청할 수 있다. 또한 오는 20일 오전10시에는 광희문 개방 축하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관광객들도 종종 보였다. 김수용(안산·32)씨는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인데, 인터넷을 통해 개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 막상 와서 보니 좋다”며 광희문을 본 소감을 말했다. 광희문 인근지역에 사는 문정구(서울 중구·42)씨는 “광희문 개방 후 길이 넓어졌다. 관광지로 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역주민으로서 광희문 주변 길이 깨끗해졌고 통행이 편해졌다”며 광희문 개방 후의 심정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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