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수(기술교육·22) 학우

“당신이 목사면 목사답게, 착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니겠소.”
“허허, 착하게 사는 거 좋지. 그런데 착하게 사는 거랑 올바르게 사는 거랑은 다른 것 같아. 남들이 하자는 대로, 그게 틀린 것 같아도 그저 반대하지 않고, 하자는 대로 하면 착하다는 말을 듣게 되지.”
“⋯⋯”
“착하게 사는 것은 생각보다 쉽네. 올바르게 사는 것이 어렵지.”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만화 〈26년〉에서 문익환 목사와 작중 가상의 등장인물 안기부 요원 최성태가 나누는 대화의 일부이다. 이 만화를 본 지도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가기에 만화 내용이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이 장면만큼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린 나이의 나에게는 이 내용이 꽤 인상 깊었나 보다. 나는 이 만화를 읽고 나서부터 ‘착하게 사는 것’과 ‘올바르게 사는 것’을 구분하게 되었다.

내가 교원대에 입학한다고 했을 때 주위로부터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교원대 학생들은 착하다”라는 말이었다. 교원대 학생들은 마음씨가 곱다는 것이다. 실제로 학교에 다니면서 좋은 학우들을 많이 만났기에,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착하다’라는 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교원대 학생들은 착하다”라는 말은 “교원대 학생들은 틀린 것 같아도 그저 반대하지 않고 하자는 대로 한다”라고 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학내에서 갑질로 논란이 되었던 교수로부터 “교원대 학생들은 착하다”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그 말이 더 이상 나에게 학생들에 대한 칭찬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교원대 학생들은 착하다.
그렇기에 대학은 학생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글로컬 사업 신청을 학생과의 충분한 논의 없이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글로컬 사업과 관련한 공청회에서 학부생을 무시하는 말도 내뱉을 수 있었다.

이는 모두 교원대 학생들은 ‘착해서’ 대학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교원대 학생들은 착하다”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글로컬 사업 신청 강행 사태에서 학생들은 더 이상 ‘착한’ 학생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대학이 하자는 대로가 아니라,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대했다. 학생들은 ‘착하게 사는 것’과 ‘올바르게 사는 것’ 중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을 선택했다. 비민주적이고 독단적인 의사 결정 과정에 분노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저항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학은 글로컬 사업 신청 강행을 포기했다. 물론 대학은 자존심이 제법 상했는지 학생들에게 사과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한동안 대학 관계자들의 입에서 “교원대 학생들은 착하다”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자신들이 하자는 대로 그저 따라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그렇게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람들한테서 꼭 “착하다”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 ‘착한 학생’이 되지 말자. 대신 ‘올바른 학생’이 되자. 주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한 일에 맞서 싸우자. 옳은 것은 옳다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이야기하자. 그렇게 올바르게 사는 게 힘들더라도 그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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