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숙(대학원 영어교육·17) 학우
이 소설은 Flannery O'Connor의 대표작으로서, 남부의 숙녀를 대표하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할머니’와 사회 부적응자를 의미하는 ‘미스핏(Misfit)’의 만남과 갈등을 통해 악이란 무엇이고, 은총과 구원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극적인 방법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할머니와 미스핏은 둘 다 자신의 도덕적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같은 도덕적 정체성을 지닌 서로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증명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미스핏의 믿음 거부와 가족의 죽음보다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한 할머니는 내재적 악의 공통점이 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이 소설에서는 정말 어려운 일로 보인다. 위선적 할머니, 무뚝뚝한 베일리, 교양 없는 며느리, 버릇없는 아이들, 살인자 미스핏까지 모두가 결점을 지니고 있으며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특히, 할머니와 미스핏을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 봤을 때, 그 이유는 더욱 분명해 보인다. 좋은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역설적으로 이들이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미스핏은 세상에 좋은 사람이 없음을 비난만 하고 자기 잘못과 어리석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회 부적응자인 두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분신처럼 닮은 모습임을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확인하게 된다. 결국 할머니는 미스핏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은총의 영광을 받게 되고, 미스핏은 할머니의 용서로 은총이 자신에게도 임했음을 깨닫게 되면서 진정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할머니와 미스핏은 사랑과 용서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죽음과 폭력으로 보여 준다.
할머니와 미스핏의 공통점은 둘 다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름 없음’, 즉 ‘정체성의 부재’는 한편으로는 주체성의 결여를,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성의 편재를 의미한다. ‘할머니’는 친근한 이미지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선한 이름의 대명사이다. 사회 부적응자란 뜻의 ‘미스핏’은 스스로가 부여한 부정의 이름으로 개인의 내면적 정체성에 대한 가면을 쓰고 있다.
처음 할머니의 이름에는 위선자, 이기주의자, 계급주의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미스핏 역시 살인자, 허무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세상에 공표해 왔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폭력적 상황에서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할머니라는 나이 든 여자의 보편적 이름은 미스핏을 용서하고 그를 그녀의 아들로 진정 받아들임으로써 ‘위대한 어머니’라는 선한 사람의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미스핏은 선한 사람으로 거듭난 할머니를 통해 세상과 조우하며 일반 사람과 마주할 수 있는 ‘적응자’가 될 은유적 함축을 보여 주고 있다. 할머니와 미스핏의 이름은 은총을 통해 왜곡된 비자아의 이미지에서 정체성을 지닌 자아의 모습으로 변모됨을 상징화한다. 할머니가 죽음의 순간 은총이 폭력의 형태로 다가온 것임을 깨닫는 것도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재탄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할머니는 마지막에 위선의 허울을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과 용서로 미스핏을 자식으로 받아들인다. 미스핏 또한 할머니의 손길로 다가온 은총의 어루만짐에 종교적 에피파니(epiphany)를 깨닫게 된다. 절망적 삶의 부조리 속에서 허무한 삶을 계속해 나가던 미스핏이 할머니의 죽음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희망이며 구원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선과 악은 반대이면서 서로 연결되고 혼합되어 있다. 할머니가 선이고 미스핏이 악이라고 정확하게 분리해서 말할 수 없는 것도 할머니에게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고, 미스핏에게 부조화의 세계 속에 갇혀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고뇌에 대한 동정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서로의 또 다른 자아로서 은총을 통한 구원을 서로에게 일깨워 주는 하나님의 대행자라고 할 수 있다.
살인자 미스핏을 통해 은총을 경험하리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할머니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미스핏을 통해 마주하며 은총이 폭력의 형태로 자신에게 올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소외되고 고립된 삶을 살아온 할머니는 미스핏과의 유대감을 형성하면서 위선과 거짓을 내려놓고 미스핏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할머니는 죽음의 순간 그녀의 또 다른 자아인 미스핏을 통해 은총을 경험하고 그에게도 은총을 깨닫게 하려고 손을 내민다. 그러나 미스핏은 할머니가 그 자신을 할머니의 자식 중 하나라며 어깨를 어루만지자 마치 뱀에게 물리기라도 한 듯 벌떡 일어나 할머니의 가슴에 세 방의 총을 쏜다. 미스핏은 은총의 자비로부터 두려움을 느낀 듯 보인다. 그의 거부는 따뜻함에 대해, 역겨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위선적 할머니가 은총을 전해 주는 사람이라는 주님의 뜻에 대한 반응이다. 따라서 할머니의 어루만짐은 미스핏에게 증오로 바뀌고 그는 잔인한 처형으로 이에 답한다.
미스핏에게서 총은 미스핏이 악마의 화신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매개체로 인간의 죄를 단죄하는 신의 대행자 역할을 한다. 따라서 미스핏은 할머니의 죄를 심판하고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린다. 이러한 그의 오만함과 왜곡된 믿음에 대한 할머니의 어루만짐은 미스핏도 은총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 나약한 인간임을 느끼게 한 신비로운 각성의 순간이었다. 이를 통해 미스핏은 사랑과 용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고 잔인함만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또 그런 삶에 즐거움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에 비로소 깨닫게 된다. 비록 살인과 죽음이라는 잔인한 고통 속에서 할머니와 미스핏은 은총의 순간을 맞이했지만, 용서와 회개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둘은 서로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며, 왜 좋은 사람은 찾기 어려운지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죽음은 인간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다. 할머니의 여행은 이러한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간의 처절한 투쟁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므로 예고 없이 찾아오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허무하게 삶을 끝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이 한없이 나약해 보인다. 할머니와 미스핏은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대표하는 서로의 거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의 모습을 통해 숨겨진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 사랑과 회개만이 은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죽음을 통해 깨닫게 되면서 진정한 용서와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