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제출 금요일까지 아니에요? 금일 자정까지라고 하셨었는데...’ 인터넷에서 대한민국 문해력 논란이라는 게시물로 뜨거웠던 카카오톡 채팅 내용의 일부이다. ▲심심하지 않은 ‘심심(甚深)한 사과’ 논란 ▲영어로 랍스터인 줄 알았다는 ‘가제(임시제목)’ 논란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영화 기생충 평론에 대해 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진 것까지. 단순히 커뮤니티에서 웃고 지나가는 수준을 넘어 아예 국정감사에서도 “왜 이렇게 질척거리냐”는 여당 의원의 질타에 한 국무 위원이 “굉장한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가 국립국어원이 성적 의미를 담은 표현이 아니라고 확인시켜 주는 등 문해력 논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한 래퍼가 노래 가사에 ‘하루 이틀 삼일 사흘’이라고 썼다가 또다시 문해력 논란에 불을 붙였다.
우리나라의 문해력 논란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현재진행형이다. 문해력이 마치 최근 들어서야 논란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에도 비슷한 논란은 계속 있었다. 1959년에 한글 교육으로 문맹률이 크게 감소한 이후 1970년대에 ‘성인 문맹 교육’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글자는 아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 특히 더 문해력이 논쟁거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옛날에는 심심한 사과가 뭔지를 모르면 부끄러워하면서 겉으로는 아는 척하고 넘어가더라도 나중에 찾아보고 배우려 했는데, 요즘은 부끄러움을 모른 채 ‘내가 모르는데 어쩌라고’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인다. 그러다 보니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라고 인식하고 그것을 대놓고 드러낸다. 과거에도 특정 단어나 표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활자에 대한 문해력이 차츰차츰 떨어지고 있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차이가 나고 이것이 문해력 저하로 이어지는 것이다.
해결하는 방법은 대화의 필요와 인정이라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스몰 토크(small talk)를 되찾자. 어릴 때만 하더라도 놀이터에 나가면 처음 보는 친구와도 이야기하고, 동네 주민, 집 앞 마트 주인 할아버지와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곤 했다. 만난 지 30분도 안 돼서 가족관계까지 다 알고 했다. 이러한 대화 속에서 나는 모르는 단어를 듣고 이게 뭘까 생각하고 알아보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도 적을뿐더러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서로 다른 문해력 수준의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며 과정 중에 자신이 모르는 말을 알고 이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또한 우선 말하는 사람은 쉬운 말을 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당장 전문 산업계 종사자들도 전문용어를 바꾸려는 노력 없이 원문 그대로 가져온다. 어려운 말을 가득 담은 글보다는 상대방이 알아듣기 쉽고 의도가 잘 전달되는 글이 좋은 글이다. 정보를 접하는 쪽에서도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배우려는 동시에 상대방이 잘 알아들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배려하면서 말하는 것들이 노력에 포함이 된다.
교사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까지 이어진다. 학교에서 과연 학생들에게 교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특히 전공이 국어교육인 만큼 고민은 깊어진다. 교사는 학생이 질문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학생에게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질문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학생은 질문하기 위해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찾을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문해력뿐만 아니라 다른 능력들도 함께 향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해력 문제는 단순히 문해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문해력을 위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이 결과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능력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대화가 많은 사회 나아가 문해력 있는 사회로 만들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