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가 살아 만나는 곳, 역사 속의 전주
전라도는 예로부터 드넓은 평야에서 비롯된 한반도 최대의 농업생산량과 더불어 바다와 갯벌, 산지에서 나는 토산물로 풍요롭기로 이름이 났다. 그 넉넉한 물적 토대는 전라도 특유의 맛과 멋의 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넘치고 찬 물산으로 전라도는 지방의 양반 지주와 서리에게 수탈당하곤 했고. 이에 전라도에는 늘 분노와 저항의 씨앗이 배태되어 있었다.
전라도의 중심은 그 이름처럼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였다. 그 중 나주는 조선시대에 들어 옛 고려왕조의 연고지로서 쇠락하지만 전주만은 이씨 왕조의 고향으로 전라도 지방의 으뜸을 지킬 수 있었다. 곧 전주는 조선시대에도 전라도의 56개 군현을 관리하는 전라감영이 세워지고 호남의 물산이 집중되는 등 정치, 경제적인 중심지로 남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주의 지나버린 옛 역사를 직접 볼 수는 없다. 지나간 과거는 되감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을 통해 옛 흔적을 아렴풋이 짚어볼 수는 있다. 더욱이 기쁜 건 여느 도시와는 달리 전주의 역사는 잘게 쪼개진 과거의 파편이 아니라 이야기의 끈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역사를 묻고 싶다면 전주로 떠나보자.
전주시외버스터미널 혹은 전주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금암광장 정류장까지 걸어간다. ‘객사’로 가는 많고 많은 버스 중 하나를 타면 된다. 객사는 시내의 현대식 건축물 한 가운데자리 잡고 있다. 객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이곳에 걸터앉아 과일을 깎아먹고 친구 끼리 약속시간에 모이는 장소로 정하는 등 전주 시민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곳이다. 그러나 객사는 나름의 역사와 상징을 담고 있어 보물 제583호로 지정된 엄연한 문화재다.
객사는 고을마다 세워진 관사로,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세우고 고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제를 올렸고 때때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이 묶는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현재 객사의 건물은 가운데의 본사(本舍)와 좌우의 동익헌, 서익헌으로 이루어져있다. 가운데 본사의 현판에는 유려한 초서체로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적혀있다. 풍패는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고향인데 전주
가 조선 왕조의 고향임을 풍패에 빗댄 것이다. 왕조 발상지로서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얼핏 보면 세 건물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오른쪽의 동익헌은 1999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었다. 1914년 일제 강점기에 도로를 확장한다는 이유로 동익헌은 물론,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맹청(盲廳), 무신사(武神舍) 등 많은 건축물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않고 객사 주변에 벚꽃나무를 심고 남은 서익헌과 본사는 상품진열소로 격하시켜 전라도의 농, 공산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사용하기 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객사를 떠나기 전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옛 전주부성의 한 가운데라는 사실이다. 객사는 왕을 모시는 공간인 만큼 그 격이 관찰사가 업무를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았고 이 때문에 성의 한 가운데 위치한 것이다. 하지만 전주에서는 어디를 둘러봐도 성벽을 찾을 수 없다. 성의 자취를 찾는 일은 아직 남은 여행의 몫이다.
객사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 일직선으로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가족회관부터 구 전라도청을 거쳐 완산경찰서가 보인다. 지금 지나가는 이 길의 오른쪽이 전라도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던 전라감영과 그 부속건물들이 있던 곳이다. 완산경찰서와 구 전라도청 사이로 난 길로 걸음을 옮기면 100년 전 전라감영의 정문인 포정루(布政樓)로 걸어들어가는 셈이다. 그러나 거대한 전라감영시설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고 그나마 남은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은 6.25 전쟁 중에 소실되어 안타까운 노릇이다. 전라감영을 두고 다시 직진하면 마지막 남은 전주부성의 흔적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豊南門)이다.
옛 전주부성은 남쪽의 풍남문, 서쪽의 패서문(沛西門), 동쪽의 완동문(完東門), 북쪽의 공북문(拱北門)이 성벽과 이어져 객사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전주부성은 1905년 조선총독부의 폐성령으로 1907년부터 철거되기 시작했다. 1907년부터 1908년까지 남문성벽부터 서문을 거쳐 북문까지, 1911년에는 남문성벽부터 동문을 거쳐 북문까지 헐어졌다.
전주와 군산 사이에 큰 길을 뚫는다는 명목으로였다. (실제로 이때 뚫은 길은 전군
가도라는 벚꽃길로 남아 있다. 이는 전주에 모인 전라도의 물산을 항구도시 군산으로
옮겨 일본 본토로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남문인 풍남문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현재의 풍남문은 화강암으로 쌓은 문루에 층 누각을 올린 형태인데 이는 영조 43
년(1767)에 만든 것이다. 누각의 바깥 현판에는 풍남문, 안쪽 현판에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고 써있다. 그러나 본래 풍남문에는 2층이 아닌 웅장한 3층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정유재란으로 불탄 풍남문을 영조 10년(1734)에 재건한 것으로, 그 누각의 이름은 명견루(明見樓)였다. 곧 영조의 식견이 뛰어난다고 아부하는 이름인데 안타깝게도 영조 43년에 큰 화재가 나명견루는 타버리고 결국 같은 해 검소한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우게 되었다.
또 하나 주목할 만 한 점은 이곳 풍남문이 동학농민운동의 격전지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전주 부성의 네 성문 바깥에는 큰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개중 서문시장이 열리는 날 동학농민군이 상인으로 변장하여 순식간에 서문으로 들어가 전주성을 점령하는데 곧 관군과 일본군이 와 전주성 바깥에서 성 안의 농민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토벌군은 풍남문 일대에 독일제 포를 쏴댔다고 한다.
풍남문 건너편에는 높은 전동성당이 비잔틴과 로마네스크 풍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과는 대조적으로 이 곳은 많은 이들의 죽음이 지나간 자리다. 전동성당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당한 터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부모의 신주를 불사른 조선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당한 자리도 바로 이곳이다.
전동성당을 건축하는 과정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숨겨져 있다. 민주화의 성지로 알려진 서울의 명동성당은 1902년에 프랑스 신부 위돌박이 중국인 벽돌공을 고용해 지었는데 4년 후 이들이 그대로 전주로 내려가 전동성당을 짓기 시작한다. 전동성당을 지을 재료는 당시 철거 중이던 전주부성에서 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주부성에는 처형한 순교자의 시신을 걸어 놨는데 이때 피가 묻은 성벽의 자재로 성당을 지으면 신성함이 깃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당 길 건너편의 경기전은 조선 왕조의 개창자인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으로
조선 초부터 따로 관리를 두어 관리해왔던곳이다. 본래 태조의 어진은 한양을 비롯해
태조가 태어난 영흥, 태조의 구택이 있는 개경, 옛 고구려와 신라의 수도인 평양과 경주에도 모셔졌으나 각자의 사연으로 모두 사라지고 전주에만 남게 된 것이다. (국내에
남은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의 어진뿐이다. 흔히 보는 세종, 정조의 어진은 해방 이
후에 제작된 것이고 고종 순종의 어진은 조선왕조의 멸망 후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어진으로 쳐주지 않는다)
옛 경기전 내부에는 전주사고가 위치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서적이 보관되어 있었다. 조선 전기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는 서울의 춘추관, 성주, 충주, 전주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에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에서 조선왕조실록이 불타 없어졌다. 이때 전주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경기전의 참봉 오희길과 태인의 선비 안의과 손흥록의 노고 덕분이었다. 특히 안의와 손홍록은 자신들의 가산을 처분해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어진을 비롯한 전주사고의 여러 서적들을 가지고 갈 여비를 마련하여 실록과 어진을 정읍 내장산의 용굴암에 숨겼고 이후 이들은 왜적을 피해 강화도를 거쳐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까지 들어갔다. 이들의 노력은 <난중일기>(이순신이 아니라 안의 혹은 손홍록이 쓴 책)에 잘 나타나 있는데 안의와 손홍록은 몇 일씩 교대로 용굴암 입구를 직접 지켰다고 한다. 이들이 구한 태조부터 명종 대까지의 조선왕조실록은 다시 필사되어 춘추관,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의 사고에 보관되었고 덕분에 우리는 조선의 어느 왕도 빠짐없는 온전한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경기전 역시 일제강점기에 남긴 흉터를 간직한 곳이다. 경기전 가운데의 본관과 오른편의 널찍한 터는 온갖 수풀로 고즈넉한 옛스러움이 물씬 풍기지만 왼편의 건물군은 최근에 지은 듯 한 모습을 보인다. 이 건물들은 본래 경기전의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근무하던 곳인데 일제강점기에 이 건물들을 모두 철거하고 소학교를 지었다. 해방 이후에도 이 학교는 남아 있었으나 2000년에 과거사 청산을 위해 학교를 옮기고 본래의 건물을 복원했다. 옮긴 학교는 중앙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경기전 바로 오른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옥마을을 돌아볼 차례다. 한옥마을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전주
에 관광지를 만드려는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처음 개장한 이후 20만명이 다녀갔고 매
해 관광객 수가 늘어 지난 2012년에는 500만명이 다녀갔다. 한옥마을이 풍기는 현대
적 옛스러움이 많은 이들의 눈에 넉넉히 차고도 남은 모양이다.
지금은 예쁜 풍경으로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이곳도 나름
의 역사적 배경 위에 서있는 곳이다. 조선 말에는 개항으로 조선 곳곳에 일본 상인들이 침투하기 시작하는데 전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일본상인은 본래 전주부성 바깥의 서문, 남문시장 일대에 자리를 잡았지만 전주부성이 철거된 이후에 일본상인들은 전주부성 안쪽으로 몰려들어 큰 상권을 형성했다.(2000년대 초까지 이곳 중앙동이 전주의 시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곧 현재의 중앙동을 중심으로 일본상인들이 터를 잡고 세 차례의 시구개정을 거쳐 도시를 정비하여 구획이 정해지고 일본식, 서양식 건물들이 세워졌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정읍, 고창, 김제의 선비들이 1930년을 전후로 전주부성 바깥 거주지 형성이 활발하지 않았던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자리를 잡기 시작해 한옥촌이 형성됐다. 이에 대해 전주시 측은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라고 평을 내렸다. 반면 전주부성 바깥의 한옥마을 형성은 민족의식과 크게 관련이 없다는 평도 있다. 전주부성 내에 일본인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자 자연스럽게 전주부성 바깥의 교동과 풍남동으로 농장을 경영하는 대지주, 자본을 축적한 중소상인이 유입되어 1930년대에 신흥한옥주거단지로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한옥마을이 민족적 자긍심의 터였는지 일제시대 부자들의 고급 주택단지였는지는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숙제다. 마지막으로한옥마을의 뒤편 오목대로 올라가 바람을맞으며 역사 공부로 지친 머리를 쉬어준다면 이번 여행에 좋은 마무리가 될 것이다.

